패전사 이야기 17편 - 머나먼 다리 : 마켓 가든 작전 (Operation Market Garden)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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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10. 03. 2020
  • 안녕하세요?
    이 작전은 2차 대전 중 가장 많은 공수부대가 투입된 대규모 작전으로 공수부대의 "마켓 작전"과 지상부대의 "가든 작전"을 합쳐서 마켓 가든 작전 (Operation Market Garden) 이라고 불립니다
    네덜란드의 에인트호번과 네이메헌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아른험과 그 교외에서 거점을 지키는데는 실패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낸 전략적으로 실패한 작전입니다
    "머나먼 다리 (Bridge Too Far)"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으며
    지금도 네덜란드에선 마켓 가든 작전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 번거로우시더라도 광고는 끝까지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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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
    - Third Gate - Wydron
    - Warrior_Strife - Jingle Punks
    - [No Copyright Music] Enchiridion - (Royalty Free Epic Music).mp4
    - [No Copyright Music] Singularity - (Royalty Free Epic Music).mp4
    - [No Copyright Music] Guardians - (Royalty Free Epic Music).mp4
    - "A Bridge Too Far" Theme - John Add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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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ww.pegasusarchive.org/arnhem/...
    ko.wikipedia.org/wiki/%EB%A7%...
    en.wikipedia.org/wiki/Operati...
    ko.wikipedia.org/wiki/%EB%A7%...
    namu.wiki/w/%EB%A7%88%EC%BC%9...

Komentáře • 336

  • @user-un5hv5tu6j
    @user-un5hv5tu6j Před 4 lety +19

    이때 몽고메리가 거의 성공한 작전이었다고, 다음에는 성공할 수 있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하자 네덜란드 여왕의 남편이 한 말이 참 걸작이죠.
    '우리나라는 당신네들이 한번 더 성공해도 될 정도로 부유한 나라가 아니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1130kwc
    @1130kwc Před 4 lety +1

    최고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봤습니다 감사감사

  • @user-bl9md9ph4w
    @user-bl9md9ph4w Před 4 lety +2

    항상 재미있게 보고있습니다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면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이 이해가 되네요~

  • @happyhour2133
    @happyhour2133 Před 4 lety +13

    히틀러처럼 전쟁을 이해못하거나 몽고메리처럼 전공에 눈먼자들때문에 아까운 젊은피를 너무흘렸던 전투였죠. 지금도 공수부대나 해병대를 보내면 무조건 상황이끝난다고 믿는자들이 군 지휘계통에 존재하지않기를 빕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Handaegi
    @Handaegi Před 4 lety +2

    기다리고 있었습니다ㅎ👍

  • @user-it2mx5hc2r
    @user-it2mx5hc2r Před 4 lety +1

    나날이 퀄리티가 발전하네요 ! !
    잘봤습니다 ㅎㅎ
    앞으로도 계속 보고싶습니다
    화이팅 !

  • @kokomundo
    @kokomundo Před 3 lety +3

    아주 좋은 설명이였어여~~

  • @user-kp4sr2sg6s
    @user-kp4sr2sg6s Před 4 lety +6

    2000년에 직접 아른햄에 가 봤습니다. 한적한 시골이고 그 '머나먼 다리'는 2차대전때 그대로 있더군요. 암스테르담에서 2시간 정도 기차 타고 가는데 한국사람이 왔다고 신기해하던 아른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른햄 역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다리가 있었고 아른햄 역 주변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한적한 시골이었습니다.
    EURO2000 축구대회를 보러 간 거였습니다. 아른햄에서도 경기가 있었거든요(포루투칼vs루마니아 경기 보러 갔었습니다)
    아른햄을 소개한 마스터카드의 안내착자에도 "마켓 가든 작전"과 영화 "머나먼 다리"의 그곳이다 라고 나올 정도로 도시 홍보에 쏠쏠히 쓰지만 정작 관련 기념비라던가 가이드를 보지는 못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 아른햄은 도심지와 여러 농가들이 있는 한적한 마을이었습니다.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기회가 되면 아른헴에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 @user-kp4sr2sg6s
      @user-kp4sr2sg6s Před 4 lety

      @@defeatube 진짜 별거ㅜ없습니다. 영화에서ㅜ나오고 그 작전 이야깋 ㄹ 때 나오는 뚝방길을 직접 보면서 "와...이러니 진격이 늦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허허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user-kp4sr2sg6s 안그래도 자료 찾다가 그 뚝방길을 봤는데 정말 좁아보이더라구요 ㅎㅎ 그 길로 전차부대가 진격했다는거 자체가 좀..

  • @voodooecho2257
    @voodooecho2257 Před 4 lety +5

    몽고메리의 판단착오로만 졌다고 알았는데 더 많은걸 알게됐네요!👍👍👍

  • @user-ww1sp6yq4y
    @user-ww1sp6yq4y Před 4 lety +2

    며칠동안 기다렸어요

  • @user-vz6hd3yf3c
    @user-vz6hd3yf3c Před 4 lety +6

    작전 첫날 하필이면 영국군의 작전계획서류를 소지하였던 장교가 체포되면서 작전계획 전반이 죄다 독일군에게 노출되어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어떤 방식의 공격을 어디로 퍼부을지 다 알았던 점이 패배의 원인이기도 했죠.

  • @user-hk9gr7sx5h
    @user-hk9gr7sx5h Před 4 lety +1

    감사합니다

  • @user-sp6oq8nw8w
    @user-sp6oq8nw8w Před 4 lety +14

    전쟁은 글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로 보는건 재미있지만 사실은 수많은 젊은 사람들을 다 저승으로 보내는 뭔신 짓들이죠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2

      맞습니다 현실은 참혹하죠

  • @user-lx1bo9mn5o
    @user-lx1bo9mn5o Před 4 lety +17

    폴란드의 소사보브스키장군은 그후 강제퇴역에 연금도 받지 못하고 공장의 노동자로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음 몰고메리 생전에 그에게 잘못이나 작전이나 패배의 책임이 없다는 걸 다들 알고있었지만 ..사후 그후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으나 너무 늦었음....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6

      넵 좀 안타까운 인물이죠 조국 폴란드에서조차도 제대로 된 평가를 못받았다고 하네요

  • @user-pp2tk9hq8g
    @user-pp2tk9hq8g Před 4 lety +1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 @gupalsam1
    @gupalsam1 Před 2 lety +14

    몽고메리던 처칠이던 작전실패로 사람죽이는데는 일가견이있군

  • @43.63
    @43.63 Před 4 lety +3

    가면 갈수록 영상 퀄리티가 엄청 좋아지네 ㅎㄷㄷ 힘내세요
    그리고 블랙호크 다운의 배경인 미국 소말리아 사태 영상도 만들어 주시면 좋을거 같아요

  • @REDSTAR-009
    @REDSTAR-009 Před 2 lety +10

    독일군 사령관이 발터 모델이였으니...

    • @rok-5858
      @rok-5858 Před rokem +1

      우주방어의 신...

  • @user-tu9kh4xp3o
    @user-tu9kh4xp3o Před 3 lety +15

    몽고메리를 너무 챙겨준 연합군의 실책이죠
    특히 미군은 영국군의 체면을 살려준답시고 지나치게 영국의 의견을 받아들여줬는데 그때문에 패튼같은 장군들은 열불이 터진
    이 엉성한 마켓가든 작전도 연합군내에서 누군가 지적하고 말리거나 보완을 건의했다면 저 지경은 안됐을 겁니다

    • @defeatube
      @defeatube  Před 3 lety +6

      폴란드의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 작전을 반대했었다고 합니다만 그 역시 희생양이 되고 말죠..

    • @user-tu9kh4xp3o
      @user-tu9kh4xp3o Před 3 lety +6

      @@defeatube 연합군내에서 자유폴란드군의 숫자가 적은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얻어쓰는 셋방살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소사보프스키 장군의 입지가 좁을수밖에 없었겠죠
      그가 아무리 반대해봤자 미군에서 적극적으로 반대의사를 내놓지 않는다면 소용없었을
      몽고메리라는 인간을 살펴볼수록 연합작전과는 전혀 걸맞지 않는 군인인데 영국군이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닐테고 참... 그러니 역시 독고다이 체질인 패튼이 죽어라 싫어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동족혐오랄까요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고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미국과 달리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고 주장했고, 그 논쟁에서 미국이 밀린 것.
      만일 당시 미국도 한 곳을 뚫자라고 주장했다면, 미국의 물량이 더 우세했기 때문에 미국의 패튼이 분명 송곳이 되었을 것.
      미국에게 묻기 바랍니다. 왜 마켓가든에 동의했는지.
      미국이 명분과 말빨 논리에서 밀리지 않았는데도 과연 송곳을 영국에게 양보했겠습니까?
      균등하게 전선면 전체에서 고르게 전진하자는 주장이 송곳으로 뚫자는 주장과 맞붙었을 때 이기겠습니까? 깨지겠습니까?
      실패했지만 시도해볼만한 모험이기도 했습니다.
      성공하면 루르로 뚫고 들어가 44년 안에 전쟁 끝나는 것이고, 실패하더라도 전선이 거기서 잠시 고착되는 정도.
      마켓가든 실패로 서부 연합군 전선이 붕괴되는 일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체되었던 정도.
      마켓가든 피해 냉정하게 보면 세계대전 상황에서 사실 큰 피해 아닙니다.
      공수부대인 마켓에서 약 1,100명 사망, 30군단의 가든에서 약 5,500명 사망, 영공수부대 포로 약 6,000명 발생.
      영국 미국 폴란드군 모두 합해서 사망+부상+실종+포로 총합 = 약18,000명
      영공수부대 손실율, 사망+포로+실종 = 약 80%로 엄청났지만, 손실 규모 자체는 세계대전 상황에서 존재감 없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입장에선 매력있는 작전이었습니다.
      성공하면 엄청난 전과로 확대 전쟁 종결을 이끌고, 실패하더라도 손실은 크지 않고, 종전만 다음 해로 미뤄지는 정도.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이 어떤 일 벌였는지 첨부할테니 마켓가든 손실과 비교해보기를.
      한국전쟁 때 단일 전투에서 국군, 북괴군, 중공군들 각각이 당한 손실 마켓가든 압도하는 경우 수두룩 합니다.
      물론 2차대전 때 소련군은 단일 전투에서 여차하면 수십만이 손실당했고, 독일 역시 전쟁 말기엔 대규모 손실 피할 수 없었죠.
      하지만 영국군은 엘알라메인이나 마켓가든 노르망디 전역에서 아무리 대규모 손실을 당했어도 2차대전 6년간 민간인 포함 45만 좀 넘는 사망.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국민방위군 사건 : 1951년 겨울, 1.4 후퇴 무렵 국방비리로 징집된 50만 중 추정치로 약 10만 얼어죽거나 굶어죽음.
      www.ynamnews.co.kr/news/12459 : 영남일보, 관련자 5명 사형. 약 9만~12만명 사망 추정. 정확한 통계 없음.
      전시임에도 예산과 군수 물자를 빼돌려, 약 10만명의 아군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사망한 천인공노할 사건.
      중공군 개입하자 예비전력 확충 목적으로 국민방위법 통과, 17세~40세 장정 총 50만 징집 후, 중공군 공세로 국민방위군
      징집 인원들 남쪽으로 후퇴하며 참사 발생. 전투가 아닌 비전투 사망 손실. 수 많은 생존자들은 폐인 수준.
      - 영남일보 기사 내용중 인용 시작
      판결 결과 근무 태만, 공금횡령, 정치관여, 군수물자 부정처분, 문서위조 등의 죄목으로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원에게 사형이 인도되었다.
      이들의 사형은 8월 13일. 대구 교외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한편. 국민방위군은 1951년 4월 30일,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폐기법’이 통과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총 동원 병력이 7만 5천명임을 따져봤을 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병력 9만 명을 몰살시키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막강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몰살당한 이들 뿐만 아니라,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하면서 군기가 문란해지지 않았으면 맥아더가 굳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밀고 올라갔을 수도 있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국무총리와 국방부 방관을 경질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4명을 총살에 처했지만, 이승만 정권에 상납된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는 아예 이뤄지지도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다섯명 총살한 것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9만 명을 몰살 국민방위군 비리 사건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 비리에 연류 되어 수만 명을 몰살시켰지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수많은 국민방위군 간부들, 즉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국민방위군이 만들어지자 별다른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소양도 능력도 없으면서, 대한청년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부대의 지휘관이 된 수 많은 급조된 방위군 장교들...
      이들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특히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軍) 경력자가 아니었다.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 인용 끝
      2차대전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자국군대 비전투 대규모 사망 사건, 독일군이나 일본군이 소련군이나 미영군
      포로들을 이동시키는 도중 보급 문제로 대규모 사망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있었지만, 자국 군에 그런 규모 사태 없음.
      식민지에서 벗어나나 마자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전쟁한 것도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부패로 전시 상황임에도 국방비리로 인해 추정치 10만의 병력이 사망하는 사태.
      전시인데도 군 경력 전무한 우익청년 조직의 수장이 50만 징집병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사 참사 무능의 극치.
      북괴군에 승리하는 중이라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한강 다리 끊고 집싸게 튄 대한민국 정부.
      1950년에 그렇게 무책임했던 정부가, 1951년에도 국민방위군 사태로 정부로서의 기능이나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반공이 최우선 이라고 해도,
      제대로된 자격을 갖춘 정부와 군이 되어야 했는데,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그랬다고 보기 힘듬.
      김일성 공산독재로 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해주겠다는 명분만으로 모든 비리, 무능, 독재를 덮고 넘어가선 안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유능 당당해서 생존한 것 결코 아닙니다.
      유엔군 특히 미군의 지원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및 식량 지원으로 무능과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생존.
      한강 다리 끊고 잽싸고 튀어서,
      그 때문에 피난 후퇴 못가고 발이 묶여 억울하게 끌려간 많은 사람들.
      서울 수복 그리고 휴전 후에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후 탈출했거나,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탄압했던 파렴치의 극한도 보였었던 대한민국 정부, 부정하기 어렵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보도연맹 사건 : 한국전쟁 중 발생한 예방 학살, 전향한 좌익인사 단체에 대한. 모집 할당으로 억울한 가입원들 많았고.
      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5191 : 부산역사문화대전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3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847894 : sbs 상생부 둔갑
      1. 보도연맹 강령 : 나무위키 인용
      강령
      1.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1.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하자.
      1. 우리는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
      1. 우리는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정책을 분쇄하자.
      1. 우리는 민족진영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보조를 일치하여 대한 기상을 발휘하자.
      2. 보도연맹 모집 : 전향한 좌익 인사 아닌 지역별 할당되어 마구 모집 등재된 사례들 : 나무위키 인용
      가입 절차와 연맹원[편집]
      김수환(65): 아무 관계 없는 사람도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강연도 했어요. 국민학교 4학년, 5학년 때...
      채의진(83): 당시에 시군으로 인원 배당을 했어요.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부역 안 한 사람도 가입하면은 쌀 준다, 비료 준다... 가난한 사람은 그거 타기 위해서 전혀 (대상이) 아니면서도 한 거예요.
      보도연맹원 가입에 대한 증언
      지서 순경이 과거 전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해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 회원, 자주통일청년단 회원, 서북청년단원을 가입 권유자로 앞장세워 리마다 일정한 할당을 주었다. 해방 초기 좌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민족 해방에 들떠 권유하는 대로 아무 단체나 가입해 겅중댄 농민들도, 당신 전력에 문제가 있다며 윽박지르면 지레 겁부터 먹고 가입 명부에 손도장을 찍었다. 해방 직후, 조국 건설에 따른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주최 교양 강좌 모임에 몇 차례만 참석했거나, 해방 이듬해 가을 인민위원회 중앙지도부의 사주 아래 남한 전역을 휩쓴 '추수봉기' 행진에 줄을 섰어도, 당신이 과거 그런 일했잖냐는 넘겨짚기에 놀라,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김원일, 『불의 제전』 17쪽
      한국전쟁 터지기 전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전향한 좌익인사들을 내세워 사상투쟁에 나섬.
      보도연맹은 전향한 좌익인사들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 지역별 할당이 부여되어 담당 공무원들이 별 생각 없이 나이 어린
      학생등 포함해 명부에 올리기도 했음. 하지만 조직의 상층부는 대한민국 정부측 인사들이 차지해서, 조직 전반을 이끌었음.
      문제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일부 보도연맹 회원들이 인민군에 협력하는 사태와 더불어 전황이 급속 악화하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두려움 공포에 질린 대한민국 정부가 예방 차원에서 학살 결정. 정확한 피해자 수는 미상.
      추정치로 10만 명 단위로 추정할 뿐.

  • @rok-5858
    @rok-5858 Před 4 lety +2

    파괴님 영상 항상 재밌게 보고있어요!!
    아 그리고 중공군이 대만 공세에 대실패했던 금문도 전투인가? 그 전투도 부탁드릴게요! ㅎㅎ

  • @NOKMANtube
    @NOKMANtube Před 3 lety +9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우리는 꼼짝없이 갇혀서 강하해 떨어지기도전에 시체가 될거요. "
    - 이 작전의 무리수를 가장 정확하게 꿰 뚫은 자유 폴란드 육군 공수여단장 소사보스키 소장의 극중 발언. 사실상 이 작전의 최대 피해자.

  • @user-un5hv5tu6j
    @user-un5hv5tu6j Před 4 lety +12

    흔히 많이들 오해하는 것이 중화기가 없는 공수부대가 독일 기갑사단 머리 위로 공수되어 박살나는 바람에 작전이 실패했다고 하죠. 영상에도 나오다시피 친위대 9, 10기갑사단은 노르망디에서 크게 박살난 뒤 휴양차 네덜란드에 온 것이어서 전력이 심히 부실했는데, 전차는 두 사단을 합쳐 무려 10 여 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도 공수사단에겐 위협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병력도 정원에 한참 딸리는 3000여명에 불과한 너덜너덜한 두 기갑사단이 쌩쌩한 공수사단을 밀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주둔군의 한심한 전력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작전을 예상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적 주력이 진격할 곳에 소모된 병력을 뿌려놓을 바보는 없으니까요.
    또한 웃기게도 연합군 사령부가 추산한 아른험의 독일군은 실제보다 오히려 많았습니다(...). 많으면 15,000명의 보병과 전차 250대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연합군이 예상보다 강력한 적을 만나게 되어 고전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결국 승리의 요인은 통념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선 발터 모델 원수가 너무 사기적인 방어전 장인이라는 것을 들 수 있겠죠.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사태를 바로 파악하고 빠르게 다른 부대들을 배치하고 증원합니다. 독일군 부대는 2개 기갑사단의, 소수의 베테랑 기갑척탄병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한심한 숙련도의 차출된 병력들이었습니다. 그런 병력들로 (중화기가 없다고는 해도)엘리트 공수 사단을 막아낸 것 부터가 굉장한 일이죠.
    또한 연합군의 진격로가 영상에도 나오듯이 외길이었고, 독일군 대전차포가 선두 전차를 부수면 대전차포 격파하랴, 잔해를 치우랴 하며 시간을 지연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또한 도중에 필요한 다리들을 독일 공병이 눈치 빠르게 폭파시키기도 하며 시간이 더욱 지연되었습니다. 공수사단이 엘리트였다 해도 보급품이 극도로 부족했기에 이런 지연은 매우 치명적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큰 요인은 지휘부의 안이한 생각이었지만요. 외길로 가야 하는데 작전이 지연될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을까요...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1

      디테일한 추가설명 감사합니다! 사실 연합군의 엘리트부대를 독일군 2급병력들로 방어한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user-jh9bx6ld6i
      @user-jh9bx6ld6i Před 4 lety +3

      숙련도도 숙련도이고 깅제징집당한 잡병 수준이라 통솔 통제 자체가 괴로가 되어버리는 병력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동시키고 전투시켰다는 것으로 이미 인외의 존재인 겁니다.
      몽고메리가 독일군이었다면 공수부대가 투입된 당일 페닉으로 지휘 자체가 안됐을 것 같네요.

  • @classy.j4669
    @classy.j4669 Před 4 lety +3

    [패인]
    1. 전략적으로 실패
    2. 연합군의 안일한 판단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판단]
    -현 상황상 더 몰아붙이면 전쟁 쉽게 끝낼 수 있다
    -네덜란드쪽의 방어병력이 적을 것
    [작전 계획]
    1. 공수부대 투입 하자. 해당 지역엔 독일군 기갑부대 없을 것 (네덜란드 레스탕스의 경고 무시하고 강행)
    2. 공수부대의 네덜란드 주요 교량 7개 점거 + 지상군 동시 진격
    3. 독일군 라인간 방어선 3일 이내 돌파
    4. 독일본토 진격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끝날 것)
    [실제 상황]
    0. 독일군 방어전 초고수인 '발터 모델'원수는 네덜란드지역의 연합군 공세 예측, 독일 사령부도 이동
    1. 공수부대 투입지역에 다수 독일 기갑부대 주둔
    2. 연합군 공수부대 투입과 동시에 지상군의 진격
    3. 독일군 부대의 교량 폭파,점거 => 미군 공수부대 고작 교량 2개 확보
    4. 영국 제1공수사단, 강하 위치 실수로 시간 지체
    5. 영국 제1공수사단 수송 위한 지프 대대, 독일군에게 전멸 -> 공수사단 도보로 이동
    6. 영국 제1공수사단, 도보이동 중 독일군의 공격으로 고립.
    7. 영국 30군단, 독일군과의 교전으로 작전 지체.
    8. 82공수사단, 강 반대쪽 상륙 성공 및 교량 탈취 But 전사자많음, 시간지체로 (실상) 작전 실패
    9. 작전 포기,후퇴

  • @markpark6450
    @markpark6450 Před 4 lety +1

    마켓가든.언제 하나 했어요 잘보겠습니다. 좋아요 구독.

  • @jamesraynor942
    @jamesraynor942 Před 4 lety +4

    마켓가든 작전은 게임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독일군 미션으로 나와서 아른헴이나 오스터르베이크 같은 지명은 알고 있었는데 이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 @user-hy9ce7lt2x
    @user-hy9ce7lt2x Před 4 lety +11

    머나먼 다리에서 마켓가든작전 입안한 몽고메리 미군들이 막 욕하던데 실제로 미군들 몽고메리 진짜 싫어했다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BKGun
    @BKGun Před 4 lety +14

    몽고메리가 욕을 처먹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미국한테 이기고 싶어서 삽질이란 삽질과 독단으로 사전 정보로 위험성이 많은 요소를 싹 무시하고 부하들을 개죽음 시켜놓고 나중에 책임은 저 폴란드 공수부대에 전가하고 지는 쏙 빠지는 모습은 군인도 아니고 더욱이 한 나라의 원수라는 고위장교의 모습은 더더욱 아님.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국민방위군 사건 : 1951년 겨울, 1.4 후퇴 무렵 국방비리로 징집된 50만 중 추정치로 약 10만 얼어죽거나 굶어죽음.
      www.ynamnews.co.kr/news/12459 : 영남일보, 관련자 5명 사형. 약 9만~12만명 사망 추정. 정확한 통계 없음.
      전시임에도 예산과 군수 물자를 빼돌려, 약 10만명의 아군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사망한 천인공노할 사건.
      중공군 개입하자 예비전력 확충 목적으로 국민방위법 통과, 17세~40세 장정 총 50만 징집 후, 중공군 공세로 국민방위군
      징집 인원들 남쪽으로 후퇴하며 참사 발생. 전투가 아닌 비전투 사망 손실. 수 많은 생존자들은 폐인 수준.
      - 영남일보 기사 내용중 인용 시작
      판결 결과 근무 태만, 공금횡령, 정치관여, 군수물자 부정처분, 문서위조 등의 죄목으로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원에게 사형이 인도되었다.
      이들의 사형은 8월 13일. 대구 교외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한편. 국민방위군은 1951년 4월 30일,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폐기법’이 통과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총 동원 병력이 7만 5천명임을 따져봤을 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병력 9만 명을 몰살시키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막강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몰살당한 이들 뿐만 아니라,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하면서 군기가 문란해지지 않았으면 맥아더가 굳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밀고 올라갔을 수도 있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국무총리와 국방부 방관을 경질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4명을 총살에 처했지만, 이승만 정권에 상납된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는 아예 이뤄지지도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다섯명 총살한 것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9만 명을 몰살 국민방위군 비리 사건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 비리에 연류 되어 수만 명을 몰살시켰지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수많은 국민방위군 간부들, 즉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국민방위군이 만들어지자 별다른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소양도 능력도 없으면서, 대한청년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부대의 지휘관이 된 수 많은 급조된 방위군 장교들...

      이들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특히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軍) 경력자가 아니었다.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 인용 끝
      2차대전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자국군대 비전투 대규모 사망 사건, 독일군이나 일본군이 소련군이나 미영군
      포로들을 이동시키는 도중 보급 문제로 대규모 사망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있었지만, 자국 군에 그런 규모 사태 없음.
      식민지에서 벗어나나 마자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전쟁한 것도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부패로 전시 상황임에도 국방비리로 인해 추정치 10만의 병력이 사망하는 사태.
      전시인데도 군 경력 전무한 우익청년 조직의 수장이 50만 징집병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사 참사 무능의 극치.
      북괴군에 승리하는 중이라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한강 다리 끊고 집싸게 튄 대한민국 정부.
      1950년에 그렇게 무책임했던 정부가, 1951년에도 국민방위군 사태로 정부로서의 기능이나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반공이 최우선 이라고 해도,
      제대로된 자격을 갖춘 정부와 군이 되어야 했는데,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그랬다고 보기 힘듬.
      김일성 공산독재로 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해주겠다는 명분만으로 모든 비리, 무능, 독재를 덮고 넘어가선 안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유능 당당해서 생존한 것 결코 아닙니다.
      유엔군 특히 미군의 지원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및 식량 지원으로 무능과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생존.
      한강 다리 끊고 잽싸고 튀어서,
      그 때문에 피난 후퇴 못가고 발이 묶여 억울하게 끌려간 많은 사람들.
      서울 수복 그리고 휴전 후에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후 탈출했거나,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탄압했던 파렴치의 극한도 보였었던 대한민국 정부, 부정하기 어렵죠.
      그 이전 부터 내려오는 기분 엿 같은 전통.
      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우리 여성들이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이혼당하고 집에서 내쳐지던 환향녀라고 멸시당했던 그 못된 전통. 조선 국왕과 조정이 잘못해놓고선.
      물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멋지게 펄럭였죠.
      북괴 공산당 김일성 독재에 협력했던 죄를 단죄해야만 대한민국이 위태롭지 않다!
      억울한 다수가 발생하더라도, 극소수의 진짜 매국노 빨갱이를 놓쳐선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다 족쳐야 한다!
      참 대단한 대한민국 정부, 정의로운 정부였습니다.
      반공만 내세우면 그 어떤 무능, 무자격, 파렴치도 덮어졌던 수치스러운 역사였습니다.
      625를 맞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글 올려봤습니다.
      여기는 북괴가 아닌 대한민국, 따라서 북괴 내부의 폭압 독재 보다 대한민국 내부 문제가 더 중요.
      그리고 북괴 민주화 운동은 위치상 북에서 해야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의미가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 민주화 인권 운동이 위치상 북에서 해서 이루어졌답니까?
      따라서 왜 북괴의 한국전쟁 만행에 대해선 언급 안하냐? 북괴의 만행은 더 심했으니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꼬리 잡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명분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음은 본능으로 느낄 겁니다. 모두가.
      그런 주장이 의미가 있기 위해선 북 내부에서 북쪽 구성원들 스스로가
      제기하고 북정권에 항의해야 세상이 변할 조짐이라도 보이는 것,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것은 가성비 너무 떨어지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타도, 서울 런던 워싱턴에서 외치는 것 허망한 것일테니.
      소련 중공 북괴 내부에서 구성원들이 목숨 걸고 외치고 수 없이 실패하면서 세월과 함께 결국은 성공하는 것!
      북괴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경제규모 생활수준이 아니라, 내부 민주화 역량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냐 여부!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보도연맹 사건 : 한국전쟁 중 발생한 예방 학살, 전향한 좌익인사 단체에 대한. 모집 할당으로 억울한 가입원들 많았고.
      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5191 : 부산역사문화대전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630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847894 : sbs 상생부 둔갑
      1. 보도연맹 강령 : 나무위키 인용
      강령
      1. 우리는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자.
      1. 우리는 망국적 북한괴뢰 정권을 절대 반대하자.
      1. 우리는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
      1. 우리는 이론무장을 강화하여 남북로당의 멸족정책을 분쇄하자.
      1. 우리는 민족진영의 각 정당 사회단체와 보조를 일치하여 대한 기상을 발휘하자.
      2. 보도연맹 모집 : 전향한 좌익 인사 아닌 지역별 할당되어 마구 모집 등재된 사례들 : 나무위키 인용
      가입 절차와 연맹원[편집]
      김수환(65): 아무 관계 없는 사람도 보도연맹 가입하라고 강연도 했어요. 국민학교 4학년, 5학년 때...
      채의진(83): 당시에 시군으로 인원 배당을 했어요. 인원을 채우기 위해서 부역 안 한 사람도 가입하면은 쌀 준다, 비료 준다... 가난한 사람은 그거 타기 위해서 전혀 (대상이) 아니면서도 한 거예요.
      보도연맹원 가입에 대한 증언
      지서 순경이 과거 전력이 있는 자의 명단을 작성해 직접 나서기도 했지만 우익 단체인 대한청년단 회원, 자주통일청년단 회원, 서북청년단원을 가입 권유자로 앞장세워 리마다 일정한 할당을 주었다. 해방 초기 좌우익이 뭔지도 모른 채 민족 해방에 들떠 권유하는 대로 아무 단체나 가입해 겅중댄 농민들도, 당신 전력에 문제가 있다며 윽박지르면 지레 겁부터 먹고 가입 명부에 손도장을 찍었다. 해방 직후, 조국 건설에 따른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주최 교양 강좌 모임에 몇 차례만 참석했거나, 해방 이듬해 가을 인민위원회 중앙지도부의 사주 아래 남한 전역을 휩쓴 '추수봉기' 행진에 줄을 섰어도, 당신이 과거 그런 일했잖냐는 넘겨짚기에 놀라,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했다.
      김원일, 『불의 제전』 17쪽
      한국전쟁 터지기 전 대한민국 정부는 남한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전향한 좌익인사들을 내세워 사상투쟁에 나섬.
      보도연맹은 전향한 좌익인사들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 지역별 할당이 부여되어 담당 공무원들이 별 생각 없이 나이 어린
      학생등 포함해 명부에 올리기도 했음. 하지만 조직의 상층부는 대한민국 정부측 인사들이 차지해서, 조직 전반을 이끌었음.
      문제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일부 보도연맹 회원들이 인민군에 협력하는 사태와 더불어 전황이 급속 악화하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두려움 공포에 질린 대한민국 정부가 예방 차원에서 학살 결정. 정확한 피해자 수는 미상.
      추정치로 10만 명 단위로 추정할 뿐.
      우리민족의 주적이 저렇게 살벌한 내부 투쟁의 적이었습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 정신 못차리고, 이데올로기 분열고 증오 장착하고 남북, 남 내부, 북 내부에서 상호 저랬죠.
      변해야 합니다. 주적이 같은 민족인 상태에선 미래나 희망은 없는 겁니다.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그렇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이 쌓아 올린 기적같은 성과 조차도, 주적이 같은 민족 상태에선 장기적으로 반드시 붕괴됩니다.
      주적이 외세인 나라들이, 주적이 공동체 내부인 정신 넋빠진 나라들을 압도한 세계사 잊어선 안됩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한국전쟁 휴전 후, 포로교환 때 벌어진 남북의 미친 행위들 : 주적이 같은 민족이면서, 증오가 넘쳐날 때 벌어진.
      1. 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6398&C_CC=BB : 귀환 원하는 국군포로 총살시킨 북괴
      2. imnews.imbc.com/replay/2020/nwdesk/article/5822412_32524.html : 귀환 포로 사상검증으로 죽음 내몬 남
      3. 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625/101676254/1 : 이승만의 포로석방이 초래한 국군포로 북 억류
      주적 명시, 주적 타령이 안보를 증진시킨다거나 더 애국이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주적에 대한 증오가 지나칠 경우, 특히 같은 민족 사이에서 주적이 되어 투쟁하고 증오하다 탈 일날 때 어떻게 되는지,
      펌한 기사들 읽어보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국전 휴전 후 포로교환에서,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던 인민군 포로들은 분계선에서 옷도 벗어 던지고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에 올라가서 사상검증으로 죽어나갈테니 쇼도 많이 포함되었겠죠. 옛 기록 영상보면 웃기면서 처량.
      한국전 휴전 당시, 북의 포로수용소의 우리 국군포로들에 대한 북에 남을건지 북괴 내부의 조사 과정에서 남한 귀한 의사
      표명한 일부 국군 포로들은 본보기 협박용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전쟁으로 대규모 인명피해를 본 북괴 입장에선 노동력이
      귀했기 때문에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죠.
      운좋게 귀환한 우리 국군 포로들은 그럼 행복했을까요?
      전쟁 중 인민군을 수용했던 포로 수용소에 가둬놓고, 사상검증하는 과정에서 일부 국군 포로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럼 왜 북괴는 노골적으로 국군포로 송환에 비협조적이었을까요? 대놓고 그러기는 체면상 힘들죠.
      이승만 대통령이 인민군 포로에 대한 자유포로 석방을 선언하고, 사상전향한 자유포로들은 대한민국 일원으로
      석방해서 대한민국에서 거주하도록 일방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 건수를 잡아 북괴는 국군포로 수를 대폭 축소 조작하고
      어쩔 수 없는 극소수 인원만 남한으로 송환시키는 쇼를 하면서, 대다수 국군포로는 사망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우리 국군포로들을 북에 남겨 강제노동을 시켰던 겁니다.
      주적관 확실하고 애국심 넘쳐나는 사람들,
      만일 지금도 전쟁이 벌어진다면 저런 비인간적인 일들이 주적 타도, 애국의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습니다.
      21세기가 문명화된 시대라고 해도,
      사실 거의 모든 국가가 유사시 즉 전쟁 발발시 대비용 긴급체포할 대상자 명단이 존재할 가능성 있습니다.
      거의 모든 나라들은 전쟁이 터지면, 메뉴얼에 맞추어 체포 명단자들은 바로 체포 구금할 것이고, 그 뒤 처리는 상황에 달린 것.
      만일 전황이 급격히 안좋아지거나 국내 여론이 악화될 경우, 체포 구금된 이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리가 뒤따를 가능성.
      주적 명시 좋아하다 보면, 주적에 대한 확고부동한 증오 대결 의식 고취하다보면, 그 정도에서만 멈추지 않게 됩니다.
      유사시에 거의 반드시 비인간적인 행위를 촉발시키는 방아쇠를 당기게 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그럴 위험을 키워선 안되는 겁니다. 같은 민족끼리 상호 그런 못난 짓하는 일 없기를.
      그러기 위해선 주적 명시 같은 헛된 짓 하지 않아야.
      주적 명시는 안보태세 확립과 아무런 실질적 관련 없습니다. 단지 내부 구호일 뿐이요.
      왜 그런 헛된 구호가 필요할까요? 우린 너네와 달라, 이 국가내에서 우리가 더 애국적이고 국가를 담당할 자격이 있어!
      까놓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것이죠. 아닐까요?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마켓가든에서 몽고메리가 잘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시에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며, 전공 가로채기와 책임 회피는 병가지상사로 반복되어왔죠.
      모든 나라에서 역사를 통해 그런 일들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영국은 그나마 세계 기준에선 꽤나 준수한 편이죠.
      1~2만의 병력손실을 당한 실패한 작전 무능으로 손가락질당했죠. 나라 밖에서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몽고메리와 같이 무능한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이 2차대전 6년간 당한 총 사망자는
      민간인 포함해서 약 45만으로 4년간 전쟁 수행한 미국과 거의 같고, 독일이나 소련과는 비교도 안되는 적은 손실.
      미국 영국이 2차대전 세계대전에서 각각 약 45만 사망자 발생했는데,
      세계대전 아닌 국지전인 한국전쟁 3년 동안 남북한은 민간인 포함 100만 단위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유능과는 거리가 먼 비효율의 극치였던 전쟁수행, 동족끼리 서로 쳐죽여대는 야만의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이 저지른 일들 소개로 첨부했으니 마켓가든 실패와 비교해보시죠.
      아예 차원이 다른 삽질입니다. 그 삽질 후 책임진 사람, 비난받은 사람 측면에서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덮었고.
      전투손실도 아닌 비전투 손실로 추정 10만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국민방위군 사건. 오늘날 일어난다면 전범으로
      기소 처벌될 예방학살인 보도연맹 사건과 믿기지 않은 휴전 후 귀환 우리 국군포로에 대한 대접 까지.
      이 댓글 다음에 마켓가든 관련 전에 올렸던 글들, 특히 전쟁 이후 현재 까지 지속되는 마켓가든 기념 행사들 포함된
      글도 첨부할테니 참조하기를. 폴란드 관련 내용들도 꽤 많습니다. 영국공수부대 노병들과 폴란드 유가족들의 만남도 포함.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user-bj3bo2mc5e
    @user-bj3bo2mc5e Před 4 lety +6

    영화 머나먼 다리는 DVD 를 소장하고 있고 도합 10번은 넘게 봤네요.
    지금도 머나먼 다리의 메인 테마 음악을 들으면 묘한 흥분감이 느껴질정도로, 개인적으로 전쟁 영화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합니다. ㅎ
    1975년에 이런 영화를 찍었다니. ㅎ
    작전에 투입된 병력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싸웠죠.
    다만, 영국 30군단의 진격이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하는데, 진격로가 기동전에 최악의 지형이었으니 딱히 지상군에게 잘못을 돌리기도 뭐했죠.
    봐알 강을 대낮에 무모하게 도하했던 82 공수 사단의 연대장이었나 했던 사람의 회고록을 원문으로 읽은적이 있는데, 기껏 죽을힘을 다해서 강을 건넜더니 영국군 전차 부대가 거기서 하루를 머문다고 했답니다.
    그 사실에 빡돌아서 선도 전차에 올라서 전차장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당장 전진하라고 개난리를 피웠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차장은 좆까셈~ 쌩까고 전차 해치를 닫고 들어가 버리더라는. ㅎ
    암튼 미군들은 30군단이 소극적이었다는 문제는 작전이 끝나고나서도 계속해서 걸고 넘어간거 같습니다.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저도 DVD로 갖고 있는데 지금 봐도 참 재미있습니다 ^^ 유명 배우들의 젊을 적 모습 보는 재미도 잇죠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콰이강의 다리, 머나먼 다리
      제가 본 전쟁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머나먼 다리는 학교 단체 관람, 콰이강의 다리는 개인적으로 보았죠.
      콰이강의 다리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받았죠. 알렉기네스 스타워즈의 오비원 케노비 역.
      아카데미 작품상 받은 전쟁 영화는 패튼대전차군단도 있지만 미국 국뽕이 너무 심해 그 영화는 별로였습니다.
      콰이강의 다리, 머나먼 다리
      두 영화는 모두 전투에서의 승리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영화죠.
      두 영화 모두 묘한 영국군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얼핏 불합리해? 보이는 명령 규율도 준수.
      머나먼 다리에서 전차 부대가 후속 보병대 기다리며 전진을 멈추는 것도 그에 해당하죠.
      콰이강의 다리에선 적군인 일본군에 도움이 되는 다리 건설에 나서는 것.
      머나먼 다리는 특히 반전 성격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미국만이 아닌 미국 영국 공동 제작 영화이고 숀코네리 같은 영국 배우도 비중있는 역활.
      하지만 몽고메리와 영국군 전차 부대등에 대한 싸늘한 시각이 여과 없이 나오죠. 미화 같은 것 전혀 없죠.
      특히 독일군과 영국군 사이에 낙하된 보급품을 가져오다 전사하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죠.
      독일군 저격에 쓰러지면서 열린 보급품 상자에 어이 없게도 베레모.
      사실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영화적 연출일 겁니다.
      2차대전 초와 달리 후반기에는 전차부대 반드시 보병과 함께 해야 했습니다. 안그러면 너무 위험해서.
      그런 이유로 영국 전차부대가 후속 보병 부대 도착 때 까지 대기한 것이겠죠.
      상부로부터 대기하라는 명령도 있었을 겁니다. 만일 안기다리고 치고 나갔다면 처벌 받았을 수도.
      실제 전쟁에선 최전선의 아군이 죽어나가더라도,
      바로 직후방에서 그냥 지켜봐야만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 때 함부로 뛰쳐나가선 안되죠.
      그럴 때 스스로 억제하고 통제가 잘되는 군대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최전방은 희생되더라도.
      전차부대가 멈추고 최전방의 영국군 공수부대는 항복하게 되지만,
      더 이상의 추가 손실이나 전선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공세가 그 선에서 저지된 정도.
      전장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애초 계획과 달라지면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할 수 밖에 없죠.
      처음에 부실하게 세워진 작전 계획 때문에 실패로 기우는데 뒤집으려 무리한 공격을 하면 더 위험해질 수도.
      그 시점에서 멈추거나, 모험을 걸거나
      선택하는 결단을 내려야 되는데 실전에선 멈췄던 것이겠죠.
      몽고메리 단 1번의 패배, 자신이 주도해 전쟁을 종결하고자 했던 욕망 부실했던 작전 계획이 초래한.

    • @user-bj3bo2mc5e
      @user-bj3bo2mc5e Před 4 lety

      @@defeatube
      최후의 초호화 캐스팅이라고 했던가요?
      유명 배우들의 리즈 시절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게 재미였죠.
      특히 프로스트 중령역의 앤소니 홉킨스는 지금의 광기 어린 눈빛이 아니라 장난스러운 모습에 영국 억양이 아주 근사하더군요.
      정말 소장가치 높은 영화 입니다.
      강력한 파이어플라이처럼 개조된 셔먼을 볼수 있는 것도 이 영화가 거의 유일하죠.

    • @user-bj3bo2mc5e
      @user-bj3bo2mc5e Před 4 lety +1

      @@scz8333
      와~~머나먼 다리를 단체 관람으로 보셨다니. ㅎㅎ
      저보다 훨씬 연배가 높으시겠어요.
      제가 이 작전에 대해서 처음 알게된건 1983년이었나, 초딩 5학년 시절쯤에 리더스 다이제스트 라는 잡지에 3부작인가 연재되었던 코닐리어스 라이언의 소설 "A bridge too far" 를 보고나서였습니다.
      그당시 처절한 전투상황과 전투원들의 심리 묘사가 대단해서 몇번을 정독을 했더랬죠
      그 이후에 1984년 현충일 특집으로 TV에서 머나먼 다리 영화를 최초로 방영했었죠. ㅎㅎ
      그게 죄다 제가 초딩 5학년~6학년 시절이었네요.
      마켓가든 작전에 대해서는 영국쪽에 특히 작전을 분석한 원서가 많은데, 지상군의 소극적인 작전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은 거의 없더군요.
      영국군 수뇌부의 안이함에 대해서는 아주 처절하게 까기는 합니다만.
      그 당시 지상군도 아주 어려운 전투를 했던건 맞죠.
      더구나 우회로 조차 없는 단일 루트를 따라서 진격하는 상황이면, 우회 돌파나 초월 공격도 할수가 없으니....
      영국애들 표현대로 Sitting duck 이 되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으니까요.

    • @n.m.n.m.
      @n.m.n.m. Před 4 lety

      영화상
      로버트레드포드가 연기했던 인물이군요...

  • @user-kp8vc9pw1o
    @user-kp8vc9pw1o Před 4 lety +4

    밴드오브브라더스에서 그 실책을 제대로 봤던 전투네요~! 제대로 알게 된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stormtrooper6602
    @stormtrooper6602 Před 4 lety +8

    무능한 지휘관의 상대가 하필이면 우주방어 발터 모델이라니....독일군을 발터 모델이 지휘해서 더 큰 피해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네요.

    • @gnj715
      @gnj715 Před 4 lety

      발터 장군이 그만큼 교육이랑 경험이 많았으니.

    • @gnj715
      @gnj715 Před 4 lety

      도이치가 오래전부터 준비를 많이 했다는걸 아셔야 합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user-nm4co3dh6e
    @user-nm4co3dh6e Před 4 lety +8

    작전계획이 너무 짧았고 세밀한 계획도 없는 진짜 초딩 수준의 밀어 붙이기 몰빵작전 게임에서도 이렇게 하진 않는데 몽고메리의 과욕으로 아까운 공수요원들만 개죽음으로 만든 작전 영화 결말이 말해주듯 민간인 가족만 살아서 피난가는 허무하게 클로징하죠 영상 잘봤어요!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user-sy9kf9kc7l
    @user-sy9kf9kc7l Před 4 lety +6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한마디로 독일군에 대한 연합국의 오만이며 특히 공수부대로 주력삼아 작전을 한다는 건 최대 실수다.(공수부대는 작전시 선봉이 될 수 있어도 주력이 될 수 없다.)

  • @lego21100
    @lego21100 Před 4 lety +15

    몽고메리는 너무 과대평가된듯...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javrick1
    @javrick1 Před 10 dny +1

    작년 네델란드 아른헴 다녀왔는데 옆에 기념관 에서 설명을 들으니 아른헴 다리는 그 후에 독일군이 아닌 연합군측이 작전상의 이유로 파괴해 버렸고 이차대전 끝난후 다시 만들었다 하네요 다리이름은 존 프로스트 다리 라고 명명하고..

  • @user-ux5qb2nn9b
    @user-ux5qb2nn9b Před 4 lety +1

    이아드랑 전투도 해주세요!

  • @user-qj2ou8nj5e
    @user-qj2ou8nj5e Před 4 lety +5

    몽고메리의 천재성을 확실히 보여준 작전 ~~~
    우리에겐 현리전투의 유재흥 명장이 있다 ~~~♥

  • @skycell9582
    @skycell9582 Před 11 měsíci +4

    하여간 머리나쁜 지휘관은 적군보다 무섭다니깐..그 좁은길로 전격전이랍시고 밀어넣은 몽고메리장군 두고두고 역사속에 까일거야...

  • @markpark6450
    @markpark6450 Před 4 lety +21

    비열한 영국군 고위층들. 폴란드장군에 책임을 지게 만들어. 섬나라놈들은 일본하고 같어.. 갈리폴리도 그렇고 책임을 않짐.

    • @slavsquatmaster2178
      @slavsquatmaster2178 Před 4 lety +1

      미국세끼들이 더했지

    • @joinso3744
      @joinso3744 Před 9 měsíci

      ​@@slavsquatmaster2178 미국 덕분에 독립하고, 6.25때 적화 피한 우리가 뱉을 입장은 아닌듯..
      적어도 너님이 ㅈ선족이 아니라면

  • @joinso3744
    @joinso3744 Před 3 lety +18

    솔직히 몽고메리 과대 평가 된듯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

      국민방위군 사건 : 1951년 겨울, 1.4 후퇴 무렵 국방비리로 징집된 50만 중 추정치로 약 10만 얼어죽거나 굶어죽음.
      www.ynamnews.co.kr/news/12459 : 영남일보, 관련자 5명 사형. 약 9만~12만명 사망 추정. 정확한 통계 없음.
      전시임에도 예산과 군수 물자를 빼돌려, 약 10만명의 아군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사망한 천인공노할 사건.
      중공군 개입하자 예비전력 확충 목적으로 국민방위법 통과, 17세~40세 장정 총 50만 징집 후, 중공군 공세로 국민방위군
      징집 인원들 남쪽으로 후퇴하며 참사 발생. 전투가 아닌 비전투 사망 손실. 수 많은 생존자들은 폐인 수준.
      - 영남일보 기사 내용중 인용 시작
      판결 결과 근무 태만, 공금횡령, 정치관여, 군수물자 부정처분, 문서위조 등의 죄목으로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원에게 사형이 인도되었다.
      이들의 사형은 8월 13일. 대구 교외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한편. 국민방위군은 1951년 4월 30일,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폐기법’이 통과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총 동원 병력이 7만 5천명임을 따져봤을 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병력 9만 명을 몰살시키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막강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몰살당한 이들 뿐만 아니라,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하면서 군기가 문란해지지 않았으면 맥아더가 굳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밀고 올라갔을 수도 있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국무총리와 국방부 방관을 경질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4명을 총살에 처했지만, 이승만 정권에 상납된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는 아예 이뤄지지도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다섯명 총살한 것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9만 명을 몰살 국민방위군 비리 사건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 비리에 연류 되어 수만 명을 몰살시켰지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수많은 국민방위군 간부들, 즉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국민방위군이 만들어지자 별다른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소양도 능력도 없으면서, 대한청년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부대의 지휘관이 된 수 많은 급조된 방위군 장교들...

      이들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특히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軍) 경력자가 아니었다.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 인용 끝
      2차대전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자국군대 비전투 대규모 사망 사건, 독일군이나 일본군이 소련군이나 미영군
      포로들을 이동시키는 도중 보급 문제로 대규모 사망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있었지만, 자국 군에 그런 규모 사태 없음.
      식민지에서 벗어나나 마자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전쟁한 것도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부패로 전시 상황임에도 국방비리로 인해 추정치 10만의 병력이 사망하는 사태.
      전시인데도 군 경력 전무한 우익청년 조직의 수장이 50만 징집병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사 참사 무능의 극치.
      북괴군에 승리하는 중이라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한강 다리 끊고 집싸게 튄 대한민국 정부.
      1950년에 그렇게 무책임했던 정부가, 1951년에도 국민방위군 사태로 정부로서의 기능이나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반공이 최우선 이라고 해도,
      제대로된 자격을 갖춘 정부와 군이 되어야 했는데,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그랬다고 보기 힘듬.
      김일성 공산독재로 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해주겠다는 명분만으로 모든 비리, 무능, 독재를 덮고 넘어가선 안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유능 당당해서 생존한 것 결코 아닙니다.
      유엔군 특히 미군의 지원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및 식량 지원으로 무능과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생존.
      한강 다리 끊고 잽싸고 튀어서,
      그 때문에 피난 후퇴 못가고 발이 묶여 억울하게 끌려간 많은 사람들.
      서울 수복 그리고 휴전 후에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후 탈출했거나,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탄압했던 파렴치의 극한도 보였었던 대한민국 정부, 부정하기 어렵죠.
      그 이전 부터 내려오는 기분 엿 같은 전통.
      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우리 여성들이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이혼당하고 집에서 내쳐지던 환향녀라고 멸시당했던 그 못된 전통. 조선 국왕과 조정이 잘못해놓고선.
      물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멋지게 펄럭였죠.
      북괴 공산당 김일성 독재에 협력했던 죄를 단죄해야만 대한민국이 위태롭지 않다!
      억울한 다수가 발생하더라도, 극소수의 진짜 매국노 빨갱이를 놓쳐선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다 족쳐야 한다!
      참 대단한 대한민국 정부, 정의로운 정부였습니다.
      반공만 내세우면 그 어떤 무능, 무자격, 파렴치도 덮어졌던 수치스러운 역사였습니다.
      625를 맞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글 올려봤습니다.
      여기는 북괴가 아닌 대한민국, 따라서 북괴 내부의 폭압 독재 보다 대한민국 내부 문제가 더 중요.
      그리고 북괴 민주화 운동은 위치상 북에서 해야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의미가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 민주화 인권 운동이 위치상 북에서 해서 이루어졌답니까?
      따라서 왜 북괴의 한국전쟁 만행에 대해선 언급 안하냐? 북괴의 만행은 더 심했으니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꼬리 잡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명분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음은 본능으로 느낄 겁니다. 모두가.
      그런 주장이 의미가 있기 위해선 북 내부에서 북쪽 구성원들 스스로가
      제기하고 북정권에 항의해야 세상이 변할 조짐이라도 보이는 것,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것은 가성비 너무 떨어지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타도, 서울 런던 워싱턴에서 외치는 것 허망한 것일테니.
      소련 중공 북괴 내부에서 구성원들이 목숨 걸고 외치고 수 없이 실패하면서 세월과 함께 결국은 성공하는 것!
      북괴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경제규모 생활수준이 아니라, 내부 민주화 역량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냐 여부!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몽고메리 : 정복왕 윌리엄 휘하의 정복군 후손, 1000년 전 출발지 노르망디로 역상륙
      1066년 노르만 정복, 정복왕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출발해 노르만 바이킹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정복합니다.
      그 정복군에 가담한 군인의 후손이 약 1000년 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지상군 최고사령관 몽고메리.
      몽고메리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얽힌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 이름 부터 웬지 영어 같지 않은 느낌이 들죠. 그렇습니다. 프랑스 계통의 이름입니다.
      알프스의 몽블랑, 몽은 마운틴, 블랑은 화이트,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백두산.
      몽고메리의 몽은 바로 불어로 산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몽고메리는 고메리 산이라는 것이죠.
      노르망디의 한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을 딴 지명에서 유래된 성씨인 겁니다.
      몽고메리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1000년의 세월을 건너 뛴 우연이라고 보기 애매한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 올립니다.
      1000년 전 조상이 침공군으로 출발했던 땅, 후손이 1000년 후 침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온 노르망디.
      바이킹의 일족이 프랑스 북서부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행패를 부리자,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던 프랑스 국왕은 그 우두머리를 영주에 봉하고 점령된 지역을 영지로 하사해 달랩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노르만족, 그들이 사는 땅이라는 말 뜻의 노르망디.
      프랑스 국왕의 신하 영주로서 노르만공.
      하지만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노르만족의 위세는 극에 달해 프랑스 내부의 영지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 보다 넓은 정도에 달했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00년 전쟁이 터지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100년 전쟁의 패배, 패배였지만 새로운 출발 이었습니다..
      노르만 지배층과 앵글로색슨 피지배층이 프랑스 영토를 상실한 이후 하나의 국민 국가로 거듭나게 되죠.
      영화로도 유명한 헨리5세 시절이면 이미 왕족과 귀족들도 국민 다수의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미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이 바로 아쟁꾸르 전투와 헨리5세 입니다.
      병력의 압도적 열세로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자, 헨리5세가 그들을 격려한 겁니다.
      이 전투에 참여-지원하지 않고 고국에서 편하게 지내는 귀족들 사람들은 후회할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함께 피흘리며 싸우는 우리는 국왕, 귀족, 평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형제다. 형제들의 모임 무리!
      참고로 헨리5세는 승리 후, 잉글랜드와 프랑스 통합 국왕에 오르지만 얼마 안되어 이질인가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죠.
      프랑스어가 섞인 노르만 바이킹의 언어가,
      대다수 앵글로색슨의 고대 게르만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오늘날의 영어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이킹의 사법제도, 관습 등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오늘날 영미법의 근간인 배심원제 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 노르만 정복으로 오늘날 영국, 그 영국에서 갈라져 나간 미국이 생겨난 겁니다.
      브리튼 제도,
      로마 시절 로마화된 문명화된 켈트족들이,
      로마에 저항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로 쫒겨난 켈트를 두려워해,
      로마군 철수 이후 동족인 야만족 켈트를 막기 위해 용병으로 독일 북서부와 덴마크에 거주하던
      앵글로색슨을 고용했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용병이 주인을 쫒아내고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한 겁니다.
      그 잉글랜드 왕국 조차 최종적으로 노르만 바이킹에게 정복되어 오늘날 영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만 정복자들의 수가 워낙 적어 그들은 결국 앵글로색슨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죠.
      원래 거주자 켈트, 굴러들어와서 박힌 돌 빼낸 앵글로색슨, 앵글로색슨을 정복한 바이킹 노르만, 그 모두가 뒤섞인 공동체.
      참고로 잔다르크 말 뜻은 잔 of 아크 : 아크 라는 동네의 잔, 불어로 of 는 de 드, 발음은 연음되어 잔드아크 아닌 잔다르크.
      몽고메리 이름도 원래는 앞에 de 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 de 몽고메리, 몽고메리 동네에 사는 ~~~
      < 몽고메리 이름에 대한 인용입니다.>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Gomeric의 산'이란 뜻의 옛 노르망디어에서 왔다고 한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서부의 지방으로 바이킹으로 알려진 북유럽인들, 즉 노르만족이 정착한 땅이다. 노르망디어는 노르만족의 원 언어가 아니라 노르망디에 정착한 후 사용하게 된 현지 방언으로 프랑스어와 같은 방언군에 속한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가장 흔한 철자는 Montgommery이며 발음은 [mɔ̃ɡɔm(ə)ʀi] '몽고므리'이다. '몽곰리'로 적으면 [몽곰니]로 발음하기 쉬우니 [ə]가 발음되는 것으로 보고 '몽고므리'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르망디에는 아직도 생트푸아드몽고므리(Sainte-Foy-de-Montgommery), 생제르맹드몽고므리(Saint-Germain-de-Montgommery), 콜빌몽고므리(Colleville-Montgomery) 같은 지명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신하 로제 드 몽고므리(Roger de Montgommery) 역시 이때 잉글랜드에 건너갔으며 후에 초대 슈로즈베리 백작(Earl of Shrewsbury)이 되었다. 이후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도 퍼졌으며 영어권에서 흔한 이름이 되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czcams.com/video/cRj01LShXN8/video.html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미국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셰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이죠.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당시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영국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백년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비는 대략 1:5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영국 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인구비는 그래도 1:3
      2차대전 당시 주요 교전국 중 영국 본토 인구는 가장 적었습니다. 4500만 정도.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독일도 1차대전 때 이미 6500만.

  • @blossomcherry1661
    @blossomcherry1661 Před 4 lety +10

    연합군이 이길수 있었던 이유는 그냥 미국의 압도적인 물량공세 소련의 하드 탱커역할뿐이지 다른것도 아니다

  • @user-dp7er4fv6h
    @user-dp7er4fv6h Před 2 lety +4

    밴드오브브라더스 에피소드중 한편인 마켓가든작전이 이거였군요

  • @user-kt8yp5ho2y
    @user-kt8yp5ho2y Před 4 lety +1

    다음에는 월맹군의 패전이자 월남군의 최후의 승전 쑤안록 전투에 대해서 다뤄주세요. ㅋㅋㅋ

  • @gabesmoh
    @gabesmoh Před 4 lety +12

    비열하고 치사하고 비겁하고 찌질하고 멍청한 몽고메리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seungleeseo9375
    @seungleeseo9375 Před 4 lety +8

    노르망디의 영광을 부러워한 실적에 목마른 영국이 몽고메리를 앞세워 저지른 작전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user-bk2sw7gg3e
    @user-bk2sw7gg3e Před 4 lety +12

    몽고메리는 북아프리카에서 지가 잘해서 롬멜이긴줄 아나봐?

    • @happyhour2133
      @happyhour2133 Před 4 lety

      사실 패튼이 오기전까진 영국군은 별전공이 없다고 봐야함.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Djdjrjjcdj
    @Djdjrjjcdj Před 4 lety +4

    영화 머나먼 다리 꼭보세요

  • @shahhin11
    @shahhin11 Před 4 lety +7

    무능한 장군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적이다

  • @user-qv1tc7co2e
    @user-qv1tc7co2e Před 4 lety +2

    머나먼다리 영화 개 재밌어요

  • @user-lw3cu8yq6c
    @user-lw3cu8yq6c Před 4 lety +3

    인트로가 마치 FPS게임 로딩같은 느낌

  • @user-nz1mt8xp9r
    @user-nz1mt8xp9r Před 2 lety +8

    몽고메리는 고문관 아닌가 ?

  • @user-eb7fr2tx1d
    @user-eb7fr2tx1d Před 4 lety +5

    현지인정보원(레지스탕스)의 경고를 무시하면 개죽음을 당한다는 엄중한 교훈.

  • @thetimemachine3502
    @thetimemachine3502 Před 4 lety +2

    한국군패전시. 안케 패스작전과 청룡부대의 오작교작전 및 짜빈동 전투

  • @user-ib8ji5lw7e
    @user-ib8ji5lw7e Před 4 lety +4

    연합군이 온힘을 모아 모델의 이름값만 드높여준 꼴

  • @aphextriplet.
    @aphextriplet. Před 4 lety +7

    내복 장군의 뻘짓

  • @user-zh6gk3gx6w
    @user-zh6gk3gx6w Před 4 lety +4

    ㅇ전과에 눈 먼 장군이 위험한 이유에 답하는작전

  • @kunholee3853
    @kunholee3853 Před 4 lety +3

    똥별도 똥별 나름이라고 2차 대전 중 최고의 똥별이 아닐까...
    엘 알라메인의 승리도 뭔가 미묘하고 그거 말곤 한것도 없고;;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5 měsíci

      엘 알라메인의 승리는 승리라고 하기에는 좀
      몽고메리가 아니더라도
      롬멜이 1 이면
      영국군은 50으로 다구리를 까는데
      영국이 지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 @Lil_Huego
    @Lil_Huego Před 4 lety +2

    패전사 볼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네요 ㅋㅋㅋ..안타까워서 그런가...

    • @user-fi7lh9wb4h
      @user-fi7lh9wb4h Před 4 lety +4

      패전사를 공부하는건 대단한겁니다 지금도 미군은 육사에서 승전보다 패전을 가르쳐요 패전을 분석하고 해서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것 이것이 진정한 승자이지요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5 měsíci +2

    이 작전의 가장 큰 실패원인이라면
    적중정보를 무시했고
    가장 중요한 요소인 통신망 구축에 실패했다는 것일 겁니다.
    몽고메리 말 대로
    90%는 성공했다고 해도
    나머지 10%가 실패해서
    2차대전 연합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으니까 말입니다.
    이 작전에 대해서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작전은 한 가닥의 실로 일곱개의 바늘귀를 단숨에 꿰는 것과 같다.
    하나만 실패해도
    모든 것이 실패한다.'
    그 10%가
    몽고메리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적중정보의 정확한 분석과 통신이었으니.........

  • @donggeunihm1636
    @donggeunihm1636 Před 3 lety +4

    역사적으로 보아도 영국군은 공격전
    보다는 수비전에 탁월한 능력발휘함
    육군의 경우를 말합니다.워털루전투
    에서도 상대방이 공격하기를 기달려서
    준비한대로 수비를 하여 전세를 뒤
    바꾸어 놓지요. 야만인과의 전투라고
    하는 줄루 족과의 전투에서도 어설프게
    공세로 나가다가 전연대가 몰살 당하게
    됩니다. 당시 최신식의 포와 총을 가지고
    있는데도 자원활용이 안되어 어정쩡한
    공수전환이 제대로 안되어 창을든
    줄루 전사들에게 몰살 됩니다. 2차 대전
    개전 초기 덩커크까지의 패퇴도 공격을
    할줄 모른게 확실 합니다. 임진강 전투에서도 소수의 영대 병력이 군단급의
    중공군 공세에맞서 완벽한 수비를 해낸
    글로스처셔 대대의 이야기. 그러이
    아이젠하워는 영군에게는 수비성향의 작전을 짜도록 했어야 하는데 정치적
    요소가 그를 붙잡았지요.패튼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면 우수한 기갑전력를 가지고 독일의 이류 부대와 싸웠을
    때만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적의 원래
    전선에서 2류 부대를 찾아내는 것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세라는 것이 적의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가
    적의 예비 병력이 움직이기 전에 후방을 교란하여 우세한 적을 혼란에 빠지게
    하여 무찌르는 것입니다. 그런 패튼 아래서 20군단장을 했던 워커 중장이
    낙동강 전투 말기에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공세로 나가야 하는데 수일간
    전전선의 적이 완강히 저항아여 어느 부대도 전진 하지 못할때 백선엽의 일사단에 나타나서 요령을 알려줍니다.
    무조건 압박 하지 말고 적의 약한 부분에
    침투하여 공세를 확장 시키는데 어디를
    어떻게 뚫을 것인지는 귀관과 귀관의 예하부대의 판단에 따르라고 알려줍니다.
    그요령대로 13연대가 적 사단과 사단사이의 경계가 약한 부분으로 침투해들어가 공세를 증강시켜가니
    적리 당황 하게되고 12연대는 적 후방 12키로 지점까지
    진출 합이다. 백장군은 전사단의 모든 가용한 병력을 그 틈새로 진출시키고
    인접한 미 1기병사단과 포위 작전을펴
    3개사단의 적을 괴멸 시키는데 이것이 패튼 작전의 전형적인 전술이 한국전
    에서도 대성공 한 예 일 것 입니다 요컨대
    영국군은 이런 임기응변의 전술에는 취약
    하다는것. 영 30군단이 전선을 뚫을때
    영화에서 보듯이 애초에 적진을 돌파할 생각을 못하고 그들에 대항해서 싸우며
    시간을 허비하는것을 보면 애초에 성공은
    물건너 간 거지요. 적이 저항 하는 곳은
    우회하여 전속력으로 돌진 하라 입니다
    그래서 소수의 부대사 약한 허점을 뚫고 후방에 진출 하면 전방에 강력한
    수비부대가 힘을 못쓰고 쇠멸되는 섯
    입니다 제3군의 이런 전략으로 한작전에서 전의를 잃고 수십만이
    무기를 놓고 포로가 되는 것인데
    이거 아무나 되는거 아니지요
    영군이나 일본군은 섬나라 라서
    그런지 사고의 발상이 고정되어
    있어서 공세에는 취약 한것 같습니다.
    마켓 가든 작전은 미군이 수행하고
    영군이 측면 방어를 해주었다면 그 결과
    가 어찌 되었을까? 이런 소부대의 후방
    지출로 망한 예가 현리 전투지요. 오마치
    고개에 일개중대의 중공군이 진출하자
    전군단이 놀라자빠져 육군 전사상 최대의
    패배를 한거지요 무기도 버리고 산속으로
    뿔뿔이 도망간것. 몽고메리는 이런 컨셉이 없는 쾌쾌묵은 아집의 소유자.
    이순신 장군이 먀 전투마다 이기니 왜군이 겁을 먹었는데 장군은 적의
    약한 집단만을 골라서 처부시는 지극
    히 간단 명료한 작전을 폈는데 왜균들이
    이런걸 파악하지 못해서 전략저으로도
    우세한 물량을 가지고도 싸우기 전에
    이미 진 것입니다 마치 독일의 장군틀이
    패튼을 존경 했듯이 왜군이 이슌신장군을
    무서워하고 존경 한것은 모두 전술의
    캠페인을 간접 어프로치를 성공적으로
    수향 한데 따른 결과 입니다. 경기병이
    강력한 보병이 수비 하는 지역에 정면
    충돌하면 이길수 없습니다 좌측 우측으로 연약한 부분으로 기병 특유의 기동성을 가지고 교란 하면 수비가 꺄어지고 그때 깨어진부뷴레 조수처럼
    침투해 들어가는 것이 기동 작전인데
    30군단이 꼴을보니 역시 영국군이군
    최고 사령관이나 기갑부대 군단장이나
    그밥에 그나물. 기동 핸렬이 속도를 내어
    달리면 그 일부에 흠집을 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정지 시킬수는 없는거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3

      마켓가든 전장 지형이 우회기동, 신나게 쌩쌩 기갑부대가 돌파 파죽지세 진격할 조건이 아닙니다.
      좁고 긴 1개의 도로로 진격해야 했으며, 진격로 곳곳엔 독일군이 매복하고 있었던 지형입니다.
      대한민국 일부 군사매니아들 자신감 충만하죠.
      자신들이 지휘했다면 북아프리카, 노르망디, 마켓가든에서 훨씬 뛰어날을 것 같은.
      북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에서 미 기갑부대 최초의 데뷰전, 캐서린 계곡에서 미군도 사실상 전멸당했죠.
      한국전쟁 때 영국군과 대한민국 육군 비교하기도 힘든 전투 능력 잊어선 안되죠. 한국전쟁은 2차대전 직후입니다.
      그리고 현재 샌드허스트 군사경연에서 대한민국은 최하위권과 중위권을 헤메고, 미국 조차 영국에 압도된 상태죠.
      그리고 착각해선 안됩니다.
      영국군은 아무리 대패당해도 잘 안죽고 병력 손실 의외로 적습니다.
      기록으로 역산하면 분명하죠. 몽고메리에게 쏟아진 비난은 불가능한 주코프의 소련 체제.
      대한민국 국군의 국민방위군 추정 10만 병력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일이 영국군에 발생했다면 총리 목 날라가죠.
      저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손실 조차도 무능이라고 극한 비난이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냉소가 가득한 것.
      우린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그 지휘부 구성원을 구국의 영웅인양 떠받드는 눈먼 자화자찬일 수도 있고.
      지난 수 백년 누적 기록상 최고의 전투 민족은 독일이 아닌 영국입니다.
      수 백년 동안 수 많은 전투에서 패했어도 전쟁엔 진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승률의 군대를,
      지난 수백년간 제대로된 전쟁 해본 적 없는
      국가의 군사매니아들이 너무나 자신감 넘치는 경솔함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왜 수군 모두에겐 치명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연안 항해만 가능했고 원양 항해가 불가능한 해군이라 해안선 가까이에서 해안선을 타고 항해하는 수준.
      만일 충무공의 적이 당시 유럽 해군이었다면,
      충무공과 붙어보고 강하다고 느껴지면 먼 바다로 우회해 서해로 진입 보급하면 상황 끝.
      당시 포루투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은 전세계 모든 바다를 항해했었고, 일본과 교역이 시작된 상태였죠.
      그런 이유로 충무공의 승리는 단순한 전투 차원의 승리를 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충무공과 유사한 최후를 맞았던 넬슨의 트라팔가 승리는 향후 100년 동안 전세계 바다의 제해권 확보.
      전쟁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류 최초 금속활자는 금속활자 자체만으로 끝,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활자 발명 수준을 넘어 유럽에 지식을 퍼트리는 촉매제.
      활자로 찍어내는 문자에서 뜻글자인 한자와 소리글자인 알파벳의 차이, 금속활자의 활용을 갈라버린 것.
      우린 불행하게도 세종의 한글 창제에도 불구하고, 한자가 주도적인 문자였고 그것이 금속활자를 사장시킨 원인.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님이 이 글에서 사용한 간접 어프로치 그 용어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것 리델 하트 때문입니다.
      영국군 장교 출신의 전쟁 역사 관련 세계적으로 저명한 저술가죠. 롬멜 전사록 역시 롬멜 아들과 롬멜의 부관등을
      인터뷰한 리델하트를 거쳐서 출판된 겁니다. 님이 사용하는 용어 자체도 그 저작권이 영국 예비역 저술가에게 있
      다는 정도는 알고 주장하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전격전 전술의 기원은 1차대전 후 영국 풀러등입니다. 구데리안이 수입된 그 저서들 읽고 영감받았죠.
      마비 충격 간접접근 그런 전술 개념이 태어난 곳이 영국입니다. 독일은 수입해서 최초로 활용 대공성을 거두었고.
      지난 수백년간 간접접근 최고의 대가는 영국이었죠.
      유럽 대륙의 대규모 전쟁에 항상 소규모 부대를 투입하면서, 돈으로 지원하면서,
      직접적인 대규모 교전은 동맹국들에게 맡기고 영국은 간접적으로 전쟁판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독일은 30년 전쟁등 오랜 기간 그 전쟁터로서 직접적으로 피와 살이 튀기는 전장이 되었습니다.
      간접접근, 마비, 충격 그런 것 하늘에게 갑자기 뚝 떨어진 것 아닙니다.
      이미 인류 역사에서 오래 전 부터 반복되었던 경험이고, 근세 이후엔 영국이 그런 경험 많았습니다.
      그런 기본 바탕에서 기갑장비가 출현한 이후의 전쟁에 대한 기본 지침으로 영국에서 출간된 것이겠죠.
      (말 보다 빠른 독일 기갑부대, 진격 속도 몽골군에 비하면 새발의 피죠.
      전격전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독일에서 창조된 것 아닙니다. 독일이 기갑부대로 첫 응용했던 정도.)
      독일이야말로 간접접근이 아닌 직접 대규모 투쟁에 몰려 2번의 세계대전 모두에서 패한 겁니다.
      영국이 간접접근 했기 때문에 2차대전 6년 동안 민간인 포함 45만 정도의 사망 피해를 당한 겁니다.
      소련과 중국 사망자 1000만도 아닌 1000만 단위, 독일 가볍게 500만 돌파와 비교도 안되는 적은 인명 손실.
      한반도의 남북이 무식하게 직접 피와 살을 튀겼기 때문에 세계대전 아닌 국지전에서
      2차대전의 영국 미국 보다 훨신 더 큰 인명피해를 초래했던 겁니다.
      간접접근, 영국은 개별 전투 차원에선 실패한 경우 있겠지만, 거시적 전쟁 차원에선 항상 성공했습니다.
      간접접근, 독일은 개별 전투 차원에서 성공한 경우 있지만, 거시적 전쟁 차원에선 언제나 실패했습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 한국전쟁에서 간접접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전쟁 때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수준의 군 최고 지도부에 구국의 영웅 따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전시작전권 빼았길 정도의 지휘능력을 가진 군과 국가가 생존한 것은
      저열한 지휘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장병들의 피와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살아 남은 수준일 겁니다.
      님은 2차대전 영국군 너무 과소평가, 미군 지나치게 과대평가 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독일 입장에서 미군은 독일의 주적이라고 도저히 체감되지 않았던 2차대전 유럽전선이었음도 알기를.
      영국은 선전포고 당일 부터, 독일 항복 최후 순간 까지 최장기 교전국이었습니다.
      소련은 1941년 중반 바바로사 부터 교전했고, 독일군 인명피해의 압도적 다수가 소련군에게 당했습니다.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교전하며 소멸했고, 독일 공군의 주력은 영국 공군과 전쟁 내내 교전했습니다.
      독일군에게 어떻게 44년 이후에야 본격 교전 시작된 미 지상군이 주적으로 체감되겠습니까?
      미국이 연합국 물주인 건 사실이지만, 독일 입장에선 주적이기에 너무 빈약한 전투 경험이죠.
      그래선지 몰라도 독일이 항복하는 순간, 최초의 항복은 영국군에게 했습니다.
      독일 항복 관련 글도 첨부하겠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

      현재 미군 영국군 함부로 볼 수 없습니다. 물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에서 해 마다 열리는 샌드허스트 경연대회 성적 보면 대충 견적 나오죠.
      4년제 미 육해공 사관학교들이 2년제 영국과 영연방 사관학교에 압도당해버렸습니다. 대한민국 육사도 물론.
      샌드허스트는 영국 육사 이름입니다.
      1960년대 미 웨스트포인트를 교환방문했던 영국 영관장교의 제안으로,
      미 육사 내부 자체 경연으로 실시되고, 우승팀에 영 육사 샌드허스트 지휘검이 수여되어 생긴 경연 명칭.
      약 30년간 웨스트포인트 내부 경연으로 실시되다,
      1994년 전세계에 문호 개방되었고, 그 때 미 사관학교 교과 과정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
      입학생도들 자질탓도 아니고, 돈이 부족해도서 아니고, 오직 교과 과정의 문제로 영국 영연방에 압도당한 것.
      영국 영연방 2년제 사관학교 출전팀원, 1학년 생도라면 불과 몇 개월,
      2학년 생도라고 해도 1년 하고 몇 개월 교육받고 출전해서 훨씬 긴 교육받고 출전한 미국팀 압도.
      2차대전 때 허접했던 영국군이 전후 개과천선 발전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죠.
      60년대 교환방문한 영국군 장교가 보기에 미 육사 교과에 치명적 문제가 있어서 보완 차원으로 제안했을 것.
      ------------------
      대한민국 육사와 다른 나라 육사들 경쟁력
      샌드허스트 경연 역대 성적 : 1994년 이후 2019년 까지, 2020년은 코로나19로 취소.
      2년제 사관학교 영국 육사 11년속 우승 포함 수 많은 우승, 대한민국 육사 첫 출전 52위/58팀 최하위권.
      미 육사팀이 첫 우승한 것은 무려 18년만에 겨우 했죠. 4년제 미 육사가 2년제 영국과 영연방팀에 완전 압도당함.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육사, , 스스로 막강하다고 자부했겠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습니다.
      1. 역대 샌드허스트 경연 우승팀 : 영국 2팀 출전 팀명은 샌드허스트1,2 또는 A,B 또는 RED, BLUE
      ------ 샌드허스트 경연 대회 역대 성적, 1994년~2019년 (영어 위키)
      Winning squad
      2009's champion squad: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Since 1994, when RMA Sandhurst began competing, either a Sandhurst squad or a RMCC squad won every competition until 2011 when Company B-3 of West Point won.[4] The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took the honours for the fifth time in 2016.
      2019 - USMA Black
      2018 - United States Air Force Academy
      2017 - USMA Black
      2016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15 - Sandhurst Red
      2014 - Sandhurst Blue
      2013 - Sandhurst Blue
      2012 - Royal Military College of Australia - Duntroon
      2011 - USMA B-3
      2010 - Sandhurst A
      2009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8 - Sandhurst Red
      2007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6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5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4 - Sandhurst Red
      2003 - Sandhurst Blue
      2002 - Sandhurst Red
      2001 - Sandhurst Blue
      2000 - Sandhurst 2
      1999 - Sandhurst 1
      1998 - Sandhurst 2
      1997 - Sandhurst 1
      1996 - Sandhurst 1
      1995 - Sandhurst 1
      1994 - Sandhurst 1
      References
      Sandhurst 2010. Department of Military Instruction. USMA website. Retrieved 2010-06-28.
      "43rd Sandhurst is Friday and Saturday". Pointer View.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April 22, 2009. Retrieved 2009-04-20.
      "Sandhurst Manual: History". Department of Military Instruction. Retrieved 2009-04-20.
      "Sandhurst Historical Results". Department of Military Instruction. Retrieved 2009-04-20.
      2. 샌드허스트 경연 대한민국 육사팀 성적
      2013년 : 52위 58개팀중, 첫 출전 충격으로 다음 해 출전않고 철저히 준비
      2015년 : 12위
      2016년 : 13위
      2017년 : 22위
      2018년 : 34위, 64개팀중
      2019년 : 26위, 가장 최근 성적
      첫 출전에서의 충격으로, 웨스트포인트 출신
      주한미군 장교에게 조언받으며, 주한미군 기지에서 특별 훈련 후 출전.
      현재는 육사 교육 과정에도 샌드허스트 경연과 유사한 경연이 포함되어 개선되었다고 함.
      2013년 첫 출전하긴 전 대한민국 육사 출신 장교단, 특히 고위 장성들. 그 진짜 내실은 사실 아무도 모르죠.
      출전해보니 세계의 높은 벽을 체감. 저런 우물안 개구리 상태, 과거 쿠테타도 하고 최후의 보루라고 자부도 했고.
      캐나다가 미국 보다 전체 우승 횟수가 더 많음.
      영국은 우승 못해도 거의 2~3위권 유지. 초창기에는출전팀 2팀이 모두 1위, 2위 동반 석권.
      미국은 영국과 영연방국에 연속 우승을 너무 많이 빼았겨, 우승만을 목표로 특별 과외 훈련했을 가능성 있음.
      최근에는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국과 영연방팀은 평소 교육 훈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출전할 여지 있고.
      대한민국 육사, 능력이 세계 속에서 저 정도입니다.
      북괴와는 아주 잘 싸울 겁니다. 내전에 특화된 오랜 역사와 전통 때문에.
      하지만 외세와의 정말 민족의 생존이 걸린 투쟁이 미래 언젠가 일어난다면 지금 남북 상태론 힘들죠.
      지난 약 150년의 우리 역사에서,
      정부와 군은 외세 앞에선 사실 빌빌대기만 했죠.
      내부 반정부 세력 진압이나 내전에서는 펄펄 날았지만, 외세 앞에선.
      몽고메리 포함 영국 장교들 모두 샌드허스트 출신인데도 2차대전에서 독일군과 교전시 어려움, 왜일까요?
      현대식 사관학교 제도가 구프로이센에서 만들어져 전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즉 샌드허스트의 원조가 프로이센이었고, 그 당시엔 아직 프로이센식 교육과정이 세계 최고라서.
      하지만 2차대전 이후엔 완전히 역전되었죠. 독일도 경연에 참여하지만 성적은 변변치 않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

      1945년 나치독일 마지막 정부 해산 : 미군, 소련군 아닌 영국군에 의해 마지막 총통 되니츠 체포 및 정부 해산 영상
      czcams.com/video/XPV963o6nTE/video.html
      2차대전 종전 항복 협상을 맡았던 독일의 마지막 정부는
      덴마크 접경 플렌스부르크에 위치해 플렌스부르크 정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히틀러 자살 후 취임한 마지막 총통 되니츠가 그 정부를 이끌고 연합국과 항복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 자살 시점 당시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되니츠가 위치했던 곳이 덴마크 접경 해안지대여서 그런 듯.
      독일 마지막 총통 되니츠 석방 동영상 1956년 : czcams.com/video/UysCvF8cxRM/video.html
      항복이 마무리 된 1945년 5월23일, 되니츠와 독일 정부는 체포되고 해산됩니다.
      미군, 소련군이 아닌 영국군이 독일의 마지막 정부 해산을 담당했습니다. 영국군 점령지였기 때문에.
      (되니츠 회고록 10년20일 : 10년은 독일 재무장부터 항복 까지 10년, 20일은 총통으로 항복 협상에 나선 20일)
      (잠수함대 이끈 되니츠 개인 입장, 가장 큰 적은 영국일테니 영국에 항복하는 형태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을 수도)
      2차대전 독일의 항복은 1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4번 정도 절차를 밟아 이루어졌습니다.
      1. 최초 항복 1945년 5월4일 : 영국군에 대한 항복
      독일 북서부, 덴마크, 노르웨이 및 일부 대서양 연안 모든 독일군과 대서양에 전개된 모든 유보트는 영국에 항복했습니다.
      몽고메리가 지휘하는 제21 집단군 사령부 야전 텐트에서
      독일 최초의 항복 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동영상 첨부합니다. czcams.com/video/HW3mK2o2IUY/video.html
      필드 마셜 육군 원수라고 해도 야전군 지휘관인 롬멜이나 몽고메리는 텐트 치고 지휘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항복식.
      2. 미군에 대한 추가 항복 5월7일 czcams.com/video/goKGAInPLho/video.html
      미군 프랑스군 등 다른 서방측 연합국에 대한 항복은 첫 항복 얼마 후 아이젠하워 사령부에서 다시 이루어집니다.
      물론 소련측은 독일측의 이런 항복 과정에 대해 매우 불쾌해했고, 소련에 대한 항복을 요구합니다.
      3.. 공식 항복 1945년 5월8일 : 보통의 경우 공식적인 항복일, V-E day, 유럽 전승 기념일.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등 참전국 대표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모든 전선에서의 최종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 때 독일측 대표가 프랑스 대표에게 왜 당신이 거기 앉아 있냐고 물었다고 하더군요. 그럴만도 하죠.
      czcams.com/video/n96hb8Uqb8g/video.html
      4. 소련군에게만 별도 항복 1945년 5월9일 : 소련측이 자신들에게만 항복하는 과정을 요구해 추가.
      소련에 억류되었던 독일군 포로들의 1955년 석방 동영상 첨부합니다. czcams.com/video/jAw3kt3BdrQ/video.html
      종전 10년이 지나서야 강제 노역을 마치고 독일로 귀환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9만5천의 포로 중에선 겨우 5천명만 생환.
      되니츠 휘하의 마지막 독일 정부는 왜 저렇게 항복했을까요?
      영국 미국에 대한 항복을 먼저하고, 소련군과의 전선은 버티면서
      더 안전한 서방측 점령지역으로 최대한 많은 병력과 피난민을 후퇴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영국과 미국은 독일측의 그 요청을 대부분 받아들여
      소련 점령 예정지에서 서방측으로 넘어오는 독일군과 피난민들을
      최대한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의 강력한 항의로 소련군에서 독일군으로 갈아탔던
      병력등에 대해선 결국 다시 소련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렇게 소련으로 보내진 소련인들의 운명은 비참했을 겁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해 시한을 정해 철수 요구, 그 철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이 독일에 먼저 선전포고.
      그 날로 부터 영국은 독일 최후의 순간 까지 가장 오랜 시간 교전했습니다. 소련은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폴란드를
      독일과 함께 분할 점령했고, 미국은 진주만 기습당할 때 까지 최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긴 측면도 있죠.
      독일의 첫 항복을 받아내고, 독일 마지막 총통과 정부를 체포하고 해산할 자격, 영국은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단순히 독일 마지막 정부의 위치가 영국군 점령지라서만이 아니라.
      2차대전, 영국은 많은 일을 했습니다. 가장 승리할 자격을 갖춘 것은 분명하죠.
      보기에 따라선 연합국 중 가장 결정적인 역활을 했습니다. 평가하고 말고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세계 최대의 제국은 단순히 수비에만 탁월해선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님은 삽질한 몇 가지 전투 사례만 언급하는 사실상의 통계 자료 취사선택으로 님의 입맛에 맞춘 해석할 뿐.
      그런 삽질 사례 없는 국가와 군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국가라도 맘만 먹으면 찾아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용인에서 왜군 기병 수백에게 당한
      조선군 수만명 사례등 모든 나라에 수 없이 널렸습니다.
      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지켰지만, 청태종이 우회 진격 남한산성 포위로 전쟁 끝났죠.
      영국 국왕이 적국 왕에게 머리 9번 땅에 박으면서 항복한 적이 있었습니까?
      영국 국왕이 나폴레옹과 같이 적에게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하거나, 히틀러와 같이 자살 몰렸습니까?
      헨리5세는 100년 전쟁에서 미드 밴드 오브 브러더스의 기원이 되는 전투를 치렀습니다.
      한반도의 우리는 임진왜란, 호란, 한국전쟁 모두에서 국가 최고 지도자가 쪽팔리는 짓거리에 연관되었고.
      수 백년 동안 모든 전쟁을 해외에서 수행한 군의 작전은 기본적으로 공세입니다. 수비가 아닌.
      수비 조차도 침공 점령한 지역에서의 전술적 수비죠. 크게 보아선 침공 공세에 포함되는 전술적 수비.
      그리고 영국은 투입한 병력 대비 성과에선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가성비를 선보였습니다.
      북아메리카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선 불과 1~2만 병력 투입하고 프랑스를 북아메리카에서 사실상 퇴출.
      쾨벡의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영프 지휘관은 모두 전사했습니다. 영국군 수장 울프 장군은 넬슨과 같은 최후.
      인도에서도 소규모 병력 투입하고 프랑스를 축출했죠. 아편전쟁에서 청나라 대군은 영국군에 추풍낙엽 패했고.
      트라팔가, 워털루와 같은 결정적 승리를 경험한 국가 군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나폴레옹의 수 많은 승리들, 1차 2차대전의 독일의 위대한 승리들은 감히 범접하기도 힘든 치명적 승리.
      워털루에서 먼저 공세 취해서 이기면 위대한 승리고, 방어전으로 이기면 그저그런 승리이겠습니까?
      영국은 침공군으로 유럽대륙에 상륙해서 워털루 전투에 임했는데, 그것이 공격이 아닌 수비이겠습니까?
      전투 방법이 뭐건 승리하면 되는 겁니다.
      적진에 침공해서 방어전술로 이겼지만 크게 보아선 공격해서 이긴 것이죠.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공세를 취해서 패했지만, 크에 보아선 워털루 자체가 나폴레옹의 방어전이죠. 아닙니까?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방어에 실패하면 프랑스는 즉시 붕괴되지만,
      웰링턴의 영국 대륙 원정군은 패배한다고 해도 전투의 패배에 지나지 않고, 언제든 대륙 침공 기회는 남아 있고.
      영국은 수백년 동안 지극히 유리한 입장에서 전쟁을 했습니다.
      전투에서 100전 100패 당해도 전쟁에서 패배라고 보기 힘든 유리한 전쟁 수행.
      영국의 적인 나폴레옹과 1차 2차 대전의 독일은 전투에서 100전 99승 1패의 위대한 승률을 올려도 패배 여지 있는.
      그런 치명적이고 커다란 것들은 보지 못하면서,
      누가 어디를 멋지게 뚫고 돌파했네 정도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전쟁과 역사를 통해 전선 돌파에만 환호하고 군 지휘관 개개인에 열광하는 차원에선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님 패튼 미3군의 코브라 돌파에 꽂힌 것 같은데,
      2차대전 초 독일이 선보인 최초의 기갑부대 전격전에 비할 수 없는 짝뚱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독일의 전쟁 초 전격전은 말 그대로 강력한 적을 마비시킨 전격전이었고, 코브라는 그런 적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의 주력 기갑부대 대부분은 까앵에서 영국군에게
      고착 소모되었고, 대규모 폭격에 거의 공황 상태에 빠진 독일 알보병 방어지역을 뚫은 겁니다.
      미국 입장에선 내세울만한 위대한 승리이고, 전후 할리웃 영화가 세계를 휩쓸면서 크게 부각되었죠.
      게다가 2차대전 초의 독일 전격전 조차도,
      과거 몽골군의 진격에 비하면 진격속도와 진격 범위, 승패 여부 모두에서 새발의 피 수준.
      몽골은 고사하고 나폴레옹에 비해서도 내세울 것 없는 성과를 초기에 잠시 거두었다 패배하고 사라진 것.
      2차대전 독일은 6년간 잠시 깃발 날렸고, 나폴레옹은 훨씬 긴 20년 동안 유럽 대륙을 석권했습니다.

  • @sovietcricket9543
    @sovietcricket9543 Před rokem +3

    결국 영국군이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그걸 위해서 너무 크게 피해를 입은 비극의 작전

  • @ensignlee692
    @ensignlee692 Před 4 lety +8

    이번 편의 주인공은 몽고메리인가
    ㅋ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역시 패튼!
    몽고메리가 먼저 들어간다고?
    뭐 아이젠하워 총사령관 지시라고?
    ㅈㄲ! 패튼 군단 돌격!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user-gn1jp5vf5w
    @user-gn1jp5vf5w Před 4 lety +5

    몽고메리 병크 ㄷㄷ

  • @user-koreagumi
    @user-koreagumi Před 4 lety +11

    몽고메리는 볼 때 마다 노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2차 엘알라메인 사상자 및 포로 실종 총합 : 독일- 30,542명, 영국-13,560명
      전차 야포 항공기 손실 : 독일- 전차 500대, 야포 254문, 항공기 84대
      영국 전차 332~500대, 야포 111문, 항공기 97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몽고메리가 물적 인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초래하고 겨우 이겼다는 주장과 많이 다르군요.
      영국이나 미군 입장에서는 사실 저 정도 피해도 본토의 여론으로는 손가락질 당할 만한 피해지만, 2차대전 일반전인 사상자 발생에 비하면 큰 손실 발생했다고 보기 힘든 수준입니다. 더구나 저 전투는 지형 때문에 우회 포위 기동을 할 수 없는 정면 돌파로 초래된 최악의 전투 방식에서 발생한 손실들입니다. (영국 전차 손실이 저렇게 ~ 범위로 나온 것은 회수되어 수리된 물량 때문일 겁니다. 독일은 후퇴로 몰려서 회수고 뭐고 할 수도 없어서 그렇고)
      1942년 10말 말 2차 엘알라메인 전투로
      독일군 방어선이 붕괴되고 후퇴할 때, 독일군에 남은 전차는 기억으로는 30여대 정도.
      몽고메리가 물량을 충분히 비축하고 공세를 펼쳤기 때문에 영국군은 그 시점에서 500대 이상의 전차를 확보.
      독일군은 도저히 회복하기 힘든 처지로 몰리고
      튀니지 까지 끝 없는 후퇴를 하고 결국 1943년 항복하게 됩니다.
      튀니지 최후의 거점 방어선인 마레트 전선에서 롬멜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차 방어망에 치명타를 입었죠.
      영국군이 마레트 전선에서 독일군 기갑부대를 격멸시킬 무렵, 햇병아리 미 전자대는 캐서린 계곡에서 거의 전멸당했고.
      패튼을 포함한 미군은 튀니지 항복할 때 까지 독 주력을 맞아 실질적 전투를 못했죠. 영국군의 보조 역활 정도.
      튀니지 항복한 독-이 추축국 병력은 무려 25만 입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 제6군이 항복할 때 9만 좀 넘은 수준이었죠.
      그 때 옛 카르타고 유적을 방문한 처칠이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승리는 끝의 시작, 아니 시작의 끝이라고 (순서 바뀔 수도) 했을 겁니다. 독일 패망의 시작을 그렇게.
      여기 게시판에서 몽고메리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의 주장이 꽤나 과장 왜곡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영국군과 몽고메리는 물량으로만, 인해전술로만, 겨우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가 무능이면, 전세계에 유능한 군대는 없습니다.
      몽고메리 최고의 삽질 마켓가든은 몽고메리가 변명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그 조차도 거대한 인명 피해는 아니죠. 당시는 세계대전이고 모험과 실패는 병가지상사일테니.
      1-2만명 손실 각오하고 시도해 성공하면 1944년에 전쟁 끝나고, 실패하면 45년으로 종전 미뤄지는 모험 도박 성격도.
      모험 실패한다고 전쟁에 패배하는 대역전 벌어지는 것도 아니죠. 승리에 대한 열망에 휩싸이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도박.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 당시, 미국이나 영국 침공군의 최고 지휘관급 위치에 있었다면,
      자신이 주도해서 전쟁을 끝내는 열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강력하게 요구하고 관철시키고 승리해서 영웅이 되고자 하겠죠.
      최악의 경우 실패한다고 해도 공세가 거기서 멈추는 정도, 실패해도독일이 2차대전 승리할 것도 아니고.
      마켓가든, 몽고메리에 대한 최대한의 변명이 가능하다면 이 정도일 겁니다.
      매력적이었으니까 아이젠하워도 ok 했겠죠.
      투입되는 병력도 수십만의 대병력도 아니고 모험해볼만 했던 것이라 ok,
      미국과 아이젠하워가 영국 보다 힘이 없어서 협박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마켓가든 ok 하지는 않았겠죠.
      당시 미국은 모든 전선에서 균등하게 전진하자는 전략이었고, 영국은 송곳으로 한 곳을 뚫자는 전략이었는데
      논리적으로 미국의 주장이 좀 어리숙한면이 있었습니다.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논쟁에서 밀려 마켓가든 ok 했을 겁니다.
      패튼과 몽고메리, 간단히 2 사람을 요약하면 서로 자신이 송곳이 되겠다고 설쳐댄 측면이 있죠.
      미국 입장에서는 패튼만한 장군이 없었고 따라서 할리웃 영화에서 미국의 전쟁 영웅 아이콘으로 부상한 측면도 있죠.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패튼은 전성기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 없고,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부터 교전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거의 모든 독일 주력 기갑군을 몸빵할 때, 그 빈틈으로 코브라 성공했죠.
      사실 영국군이 독일 주력 고착 소모시킬 때 미군 돌파가
      상륙하기 전에 새운 노르망디 작전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계획 그대로 된 겁니다.
      벌지 때 사실 패튼이 거기에 있었건 없었건 독일군은 전선 돌파 할 수 없었죠. 패튼 없었으면 미군 정말 붕괴? NO!
      패튼은 마켓가든과 같은 단독의 송곳이 되지 못했고, 몽고메리는 송곳이 되었지만 뚫지 못한 동일한 본질의 야망가들.
      작전 실패했다고 그 작전이 전부 글러먹은 것은 아닙니다.
      작전 실행 이전에는 그 누구도 작전과 전투의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가능성과 손실을 예상하며 주사위를 던질 뿐.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sogogi29
    @sogogi29 Před 3 lety +1

    포스트 스크립텀으로 직접 해보면 ㄹㅇ 그당시의 곷통이 느껴짐

  • @minungkang536
    @minungkang536 Před 4 lety +3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아군을 다진고기로 만드려는 성공한 작전 아니었나요?

  • @user-vw5qp1fv6f
    @user-vw5qp1fv6f Před 3 lety +15

    무능한 몽고메리 똥별만달고 똥품만달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국민방위군 사건 : 1951년 겨울, 1.4 후퇴 무렵 국방비리로 징집된 50만 중 추정치로 약 10만 얼어죽거나 굶어죽음.
      www.ynamnews.co.kr/news/12459 : 영남일보, 관련자 5명 사형. 약 9만~12만명 사망 추정. 정확한 통계 없음.
      전시임에도 예산과 군수 물자를 빼돌려, 약 10만명의 아군이 전투 한 번 못해보고 사망한 천인공노할 사건.
      중공군 개입하자 예비전력 확충 목적으로 국민방위법 통과, 17세~40세 장정 총 50만 징집 후, 중공군 공세로 국민방위군
      징집 인원들 남쪽으로 후퇴하며 참사 발생. 전투가 아닌 비전투 사망 손실. 수 많은 생존자들은 폐인 수준.
      - 영남일보 기사 내용중 인용 시작
      판결 결과 근무 태만, 공금횡령, 정치관여, 군수물자 부정처분, 문서위조 등의 죄목으로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원에게 사형이 인도되었다.
      이들의 사형은 8월 13일. 대구 교외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었다. 한편. 국민방위군은 1951년 4월 30일,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폐기법’이 통과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6.25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총 동원 병력이 7만 5천명임을 따져봤을 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병력 9만 명을 몰살시키지만 않았으면, 우리는 막강한 전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몰살당한 이들 뿐만 아니라, 부당한 처우를 견디지 못한 국민방위군들은 집단탈출하기 시작하면서 군기가 문란해지지 않았으면 맥아더가 굳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밀고 올라갔을 수도 있다.
      국민들의 여론이 들끓자 국무총리와 국방부 방관을 경질시키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4명을 총살에 처했지만, 이승만 정권에 상납된 정치자금에 대한 수사는 아예 이뤄지지도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다섯명 총살한 것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9만 명을 몰살 국민방위군 비리 사건을 덮어버린 것이다.

      당시 비리에 연류 되어 수만 명을 몰살시켰지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던 수많은 국민방위군 간부들, 즉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국민방위군이 만들어지자 별다른 군사 교육을 받은 적도, 소양도 능력도 없으면서, 대한청년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부대의 지휘관이 된 수 많은 급조된 방위군 장교들...

      이들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백색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정규군으로서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특히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 중국군(국부군)이나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군(軍) 경력자가 아니었다.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 인용 끝
      2차대전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자국군대 비전투 대규모 사망 사건, 독일군이나 일본군이 소련군이나 미영군
      포로들을 이동시키는 도중 보급 문제로 대규모 사망사건이 발생한 경우는 있었지만, 자국 군에 그런 규모 사태 없음.
      식민지에서 벗어나나 마자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려 전쟁한 것도 한심하기 그지 없는데,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부패로 전시 상황임에도 국방비리로 인해 추정치 10만의 병력이 사망하는 사태.
      전시인데도 군 경력 전무한 우익청년 조직의 수장이 50만 징집병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인사 참사 무능의 극치.
      북괴군에 승리하는 중이라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한강 다리 끊고 집싸게 튄 대한민국 정부.
      1950년에 그렇게 무책임했던 정부가, 1951년에도 국민방위군 사태로 정부로서의 기능이나 반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반공이 최우선 이라고 해도,
      제대로된 자격을 갖춘 정부와 군이 되어야 했는데,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군은 그랬다고 보기 힘듬.
      김일성 공산독재로 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해주겠다는 명분만으로 모든 비리, 무능, 독재를 덮고 넘어가선 안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생존한 것,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유능 당당해서 생존한 것 결코 아닙니다.
      유엔군 특히 미군의 지원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및 식량 지원으로 무능과 무자격에도 불구하고 생존.
      한강 다리 끊고 잽싸고 튀어서,
      그 때문에 피난 후퇴 못가고 발이 묶여 억울하게 끌려간 많은 사람들.
      서울 수복 그리고 휴전 후에 북괴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후 탈출했거나,
      강제 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을 부역자로 탄압했던 파렴치의 극한도 보였었던 대한민국 정부, 부정하기 어렵죠.
      그 이전 부터 내려오는 기분 엿 같은 전통.
      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우리 여성들이 조선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이혼당하고 집에서 내쳐지던 환향녀라고 멸시당했던 그 못된 전통. 조선 국왕과 조정이 잘못해놓고선.
      물론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멋지게 펄럭였죠.
      북괴 공산당 김일성 독재에 협력했던 죄를 단죄해야만 대한민국이 위태롭지 않다!
      억울한 다수가 발생하더라도, 극소수의 진짜 매국노 빨갱이를 놓쳐선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다 족쳐야 한다!
      참 대단한 대한민국 정부, 정의로운 정부였습니다.
      반공만 내세우면 그 어떤 무능, 무자격, 파렴치도 덮어졌던 수치스러운 역사였습니다.
      625를 맞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계기로 글 올려봤습니다.
      여기는 북괴가 아닌 대한민국, 따라서 북괴 내부의 폭압 독재 보다 대한민국 내부 문제가 더 중요.
      그리고 북괴 민주화 운동은 위치상 북에서 해야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의미가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 민주화 인권 운동이 위치상 북에서 해서 이루어졌답니까?
      따라서 왜 북괴의 한국전쟁 만행에 대해선 언급 안하냐? 북괴의 만행은 더 심했으니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말꼬리 잡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명분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음은 본능으로 느낄 겁니다. 모두가.
      그런 주장이 의미가 있기 위해선 북 내부에서 북쪽 구성원들 스스로가
      제기하고 북정권에 항의해야 세상이 변할 조짐이라도 보이는 것,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것은 가성비 너무 떨어지죠.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타도, 서울 런던 워싱턴에서 외치는 것 허망한 것일테니.
      소련 중공 북괴 내부에서 구성원들이 목숨 걸고 외치고 수 없이 실패하면서 세월과 함께 결국은 성공하는 것!
      북괴와 대한민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경제규모 생활수준이 아니라, 내부 민주화 역량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냐 여부!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몽고메리 : 정복왕 윌리엄 휘하의 정복군 후손, 1000년 전 출발지 노르망디로 역상륙
      1066년 노르만 정복, 정복왕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출발해 노르만 바이킹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정복합니다.
      그 정복군에 가담한 군인의 후손이 약 1000년 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지상군 최고사령관 몽고메리.
      몽고메리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얽힌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 이름 부터 웬지 영어 같지 않은 느낌이 들죠. 그렇습니다. 프랑스 계통의 이름입니다.
      알프스의 몽블랑, 몽은 마운틴, 블랑은 화이트,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백두산.
      몽고메리의 몽은 바로 불어로 산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몽고메리는 고메리 산이라는 것이죠.
      노르망디의 한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을 딴 지명에서 유래된 성씨인 겁니다.
      몽고메리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1000년의 세월을 건너 뛴 우연이라고 보기 애매한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 올립니다.
      1000년 전 조상이 침공군으로 출발했던 땅, 후손이 1000년 후 침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온 노르망디.
      바이킹의 일족이 프랑스 북서부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행패를 부리자,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던 프랑스 국왕은 그 우두머리를 영주에 봉하고 점령된 지역을 영지로 하사해 달랩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노르만족, 그들이 사는 땅이라는 말 뜻의 노르망디.
      프랑스 국왕의 신하 영주로서 노르만공.
      하지만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노르만족의 위세는 극에 달해 프랑스 내부의 영지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 보다 넓은 정도에 달했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00년 전쟁이 터지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100년 전쟁의 패배, 패배였지만 새로운 출발 이었습니다..
      노르만 지배층과 앵글로색슨 피지배층이 프랑스 영토를 상실한 이후 하나의 국민 국가로 거듭나게 되죠.
      영화로도 유명한 헨리5세 시절이면 이미 왕족과 귀족들도 국민 다수의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미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이 바로 아쟁꾸르 전투와 헨리5세 입니다.
      병력의 압도적 열세로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자, 헨리5세가 그들을 격려한 겁니다.
      이 전투에 참여-지원하지 않고 고국에서 편하게 지내는 귀족들 사람들은 후회할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함께 피흘리며 싸우는 우리는 국왕, 귀족, 평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형제다. 형제들의 모임 무리!
      참고로 헨리5세는 승리 후, 잉글랜드와 프랑스 통합 국왕에 오르지만 얼마 안되어 이질인가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죠.
      프랑스어가 섞인 노르만 바이킹의 언어가,
      대다수 앵글로색슨의 고대 게르만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오늘날의 영어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이킹의 사법제도, 관습 등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오늘날 영미법의 근간인 배심원제 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 노르만 정복으로 오늘날 영국, 그 영국에서 갈라져 나간 미국이 생겨난 겁니다.
      브리튼 제도,
      로마 시절 로마화된 문명화된 켈트족들이,
      로마에 저항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로 쫒겨난 켈트를 두려워해,
      로마군 철수 이후 동족인 야만족 켈트를 막기 위해 용병으로 독일 북서부와 덴마크에 거주하던
      앵글로색슨을 고용했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용병이 주인을 쫒아내고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한 겁니다.
      그 잉글랜드 왕국 조차 최종적으로 노르만 바이킹에게 정복되어 오늘날 영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만 정복자들의 수가 워낙 적어 그들은 결국 앵글로색슨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죠.
      원래 거주자 켈트, 굴러들어와서 박힌 돌 빼낸 앵글로색슨, 앵글로색슨을 정복한 바이킹 노르만, 그 모두가 뒤섞인 공동체.
      참고로 잔다르크 말 뜻은 잔 of 아크 : 아크 라는 동네의 잔, 불어로 of 는 de 드, 발음은 연음되어 잔드아크 아닌 잔다르크.
      몽고메리 이름도 원래는 앞에 de 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 de 몽고메리, 몽고메리 동네에 사는 ~~~
      < 몽고메리 이름에 대한 인용입니다.>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Gomeric의 산'이란 뜻의 옛 노르망디어에서 왔다고 한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서부의 지방으로 바이킹으로 알려진 북유럽인들, 즉 노르만족이 정착한 땅이다. 노르망디어는 노르만족의 원 언어가 아니라 노르망디에 정착한 후 사용하게 된 현지 방언으로 프랑스어와 같은 방언군에 속한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가장 흔한 철자는 Montgommery이며 발음은 [mɔ̃ɡɔm(ə)ʀi] '몽고므리'이다. '몽곰리'로 적으면 [몽곰니]로 발음하기 쉬우니 [ə]가 발음되는 것으로 보고 '몽고므리'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르망디에는 아직도 생트푸아드몽고므리(Sainte-Foy-de-Montgommery), 생제르맹드몽고므리(Saint-Germain-de-Montgommery), 콜빌몽고므리(Colleville-Montgomery) 같은 지명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신하 로제 드 몽고므리(Roger de Montgommery) 역시 이때 잉글랜드에 건너갔으며 후에 초대 슈로즈베리 백작(Earl of Shrewsbury)이 되었다. 이후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도 퍼졌으며 영어권에서 흔한 이름이 되었다.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czcams.com/video/cRj01LShXN8/video.html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미국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셰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이죠.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당시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영국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백년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비는 대략 1:5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영국 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인구비는 그래도 1:3
      2차대전 당시 주요 교전국 중 영국 본토 인구는 가장 적었습니다. 4500만 정도.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독일도 1차대전 때 이미 6500만.

  • @garduak
    @garduak Před 3 lety +2

    레드데빌

  • @user-fk8lo2xn8d
    @user-fk8lo2xn8d Před 4 lety +4

    영국은 진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었는지 의문이네요.... 시기를 잘 만나서 그런건가... 아니면 백역사보다 흑역사가 임팩트가 커서 그런걸까요....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동영상에 달았던 댓글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 영국은 왜 패권 경쟁에서 승리했는가? >
      약자를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강대국, 패권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약육강식의 생존투쟁 끝에 승리한 자가 그 위치를 쟁취하는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패권국도 비판할 여지는 충분하며, 악행은 우주를 덮을 정도로 많음도 분명합니다.
      그런 기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냉정하게 비판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독일이 잘못했지만 영국도 마찬가지로 잘못했다, 이런 식 보다는 더 차갑게 비판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영국은 깡패, 그러나 단순한 깡패가 아닌 그나마 가장 교양있는 깡패!
      깡패인데 감히 세계 표준을 만들고, 전세계에 강요해 퍼트리고, 오늘날 현대 세계의 생활 양식을 지배합니다.
      1. 의회 대의 민주주의
      2.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3. 현대 자연과학 시작
      4. 근현대 룰 제도화된 스포츠
      세상의 어떤 깡패가 이런 결정적 분야 모두를 다 홀로 독점적으로 표준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만일 조선이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다면 조선은 저런 표준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지금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 앞으로 세계 패권을 장악한다면 현재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요?
      아닐 확률이 클 겁니다. 그나마 가장 자격 있고 교양 있는 세력이 패권을 가진 행운을 인류가 누렸을 수도 있습니다.
      영국의 경쟁자들, 시대 순으로 나열해보죠.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러시아, 독일 : 그들 중 누가 과연 저렇게 세계를 기본 포맷할 수 있겠습니까?
      네덜란드는 영국과 거의 유사한 공동체 성격을 가졌습니다.
      네덜란드가 영국에 패한 단 하나의 이유는 영국 보다 공동체 규모가 작았다는 것.
      그러나 나머지 모든 경쟁자들은 기본적으로 더 중앙집권적, 더 독재적, 더 전체주의적 이었습니다.
      스페인은 신대륙 식민지를 직할 통치했습니다.
      영국은 사실상 거의 자치를 누린 식민지였죠. 영국 식민지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널널하고 자유롭고 풍요로운 통치 조차 압제라고 떨쳐 일어나 기어코 독립해 오늘날 미국이 되죠.
      캐나다와 호주는 인구가 적어 미국과 같은 강대국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와 풍요를 누립니다.
      하지만 스페인과 스페인 식민지들은 어떻습니까? 스페인은 스페인 내전으로 1975년 프랑코 총통 독재였습니다.

      러시아, 푸틴이 지금 종신 대통령하려고 하고 있고 국민들 지지도 대단하죠.
      제정 러시아, 공산 혁명 후 소련, 공산주의 붕괴된 이후 러시아 모두 본질적으로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하고 있죠.
      억압적인 통치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그 통치에 반응하는 공동체 구성원들 책임도 큽니다.
      자국민에게도 극단적인 압제의 역사가 있는 국가가 세계 패권을 장악하면 세계에 희생과 포용이 가능할까요?
      프랑스, 루이14세가 짐은 국가라고 선언하던 그 때
      영국은 명예혁명으로 왕권은 허울로 전락하고 의원내각제가 성립합니다.
      또한 바로 그 시기에 뉴턴이 평민으로서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장됩니다. 수준의 차가 확연한 겁니다.
      프랑스는 결국은 대혁명을 맞이합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4개 지역으로 구성되며,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 기타 지역은 켈트라는 극단적인 내부 민족 분열 요소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먼저 잉글랜드 내부에서의 점진적 민주화 왕권 제한이 일어나고,
      잉글랜드 주도로 나머지 지역을 합병한 이후에 내부의 극단적 적대감이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로 폭발해서 스스로의 내부 역량 에너지는 헛된 곳에 낭비되는 것 막았죠.
      정치적 군사적 혁명들은 대체로 쓰레기 사이비 혁명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최종적으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로 스스로 붕괴했습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비스마르크의 독일에게 패할 때 까지 프랑스는 반세기 이상 왕정 공화정의 쿠테타 연속이었죠.
      (영국은 산업혁명이라는 비정치적 비군사적 혁명을 성공시켰습니다. 인류의 삶을 송두리체 바꿨죠.)
      프랑스가 그렇게 내부에서 헤멜 때, 영국은 그냥 세계를 접수한 겁니다.
      100년 전쟁 때 영국은 프랑스 인구의 1/5, 나폴레옹 때는 1/3 이라는 극단적 열세 조건이었는데 말입니다.
      마지막 경쟁자 독일,
      독일을 물리쳤지만 대영제국 역시 최종적으로 붕괴했습니다.
      대영제국이 인류에 끼친 해악에 대한 하늘이 내린 징벌로서 대영제국의 해체로 겨우 막아냈는지 몰라도.
      그렇다면 독일은 어떤가요?
      독일 통일의 주체세력 프로이센은 사실상 병영국가 전체주의 국가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병영국가 프로이센의 전략적 우두머리 로서 통일 독일제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비스마르크 본인은 냉철하고 자제심이 강해 독일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으려 현명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설계한 병영국가 전체주의 독일의 문제점은 훗날 터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차, 2차 대전이겠죠.
      특히 2차대전에서의 독일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벌였습니다.
      괴테와 베토벤의 나라가 어쩌다 그런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했을까요? 우연일까요?
      이제 질문하겠습니다.
      영국이 아닌 다른 경쟁자들이 패권 경쟁에서 승리했다면 세계는 어땠을까요?
      영국이 만든 저 4개의 세계 표준을 능가하는 표준을 만들 능력이 되었을까요? 개인적으로 능력 없다고 보입니다.
      영국과 경쟁했거나 나중에 도전했던 세력들은 패권 장악에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사용하고 영국과 같은 문화를 가진 미국은 영국과의 무력 투쟁에서 승리한 방식이 아닌
      영국이 2번의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져 몰락하는 가운데 함께 동맹으로서 협력하며 평화적으로 패권을 인수했죠.
      아마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패권 이전일 겁니다.
      영국이 대단한 점이 있다면,
      저렇게 조그만 집단이 그것도 내부의 극단적 민족간 투쟁
      앵글로색슨과 켈트라는 자폭 분열 요소를 안고서도 점진적 민주화를 성취하고,
      그에 바탕해 자유로운 공동체 분위기 아래서 창조성이 폭발해서 저 모든 표준을 독점적으로 완성한 것.
      (단일민족인 우리는 해방 후 한국전 터지고, 현재 무력 대치 중, 절반의 남쪽은 다시 동서 분열 중)
      (보기에 따라 참으로 한심한 자폭성 내부 분열과 에너지 낭비 중. 따라서 세계 패권 도전이고 뭐고 할 여유 없음)
      거기에 더해, 영국의 엎글 버전인
      앵글로색슨만이 아닌 유럽 사회에 개방된 미국이라는 대체 세력이 탄생하도록 본의 아니게 한 점
      결과적으로 지난 수 백년 간의 세계사는 사실상 저들의 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들러리.
      비스마르크의 통일 독일제국의 위세가 아무리 드높고,
      독일의 과학 기술 수준이 아무리 높다고 한들 세계 표준 장악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죠.
      과학의 예로서 물리의 경우 가장 기본 단위들 이름이 영국인 이름입니다. 독일인 이름 별로 없죠.
      과학에서도 독일이 최선봉은 아니라는 것. 산업혁명이 독일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죠.
      기본 단위 이름이 독일어가 아닌데 독일이 무슨 과학의 최선두가 되겠습니까?
      물리학에서
      힘의 단위 뉴턴 N, 일과 에너지 단위 쥴 J, 일률의 단위 와트 W, 절대온도 단위 켈빈 K 모두 영국인 이름입니다.
      기본 입자 중의 기본 입자인
      전자, 양성자, 중성자 그리고 원자핵 모두 영국 과학자들이 실험으로 입증했습니다. 미국도 들러리..
      미국인들이 내세우는 최대 과학적 성과인 명왕성은 행성에서 자격 미달로 퇴출되었죠.
      미국이 너무 늦게 과학에 입문해서 미국이 기본 바탕에 낄 건더기가 없던 것.
      앞으로 수 백년 지나면 미국인 이름 들어간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어 많아질 수도 있겠지만.
      독일의 과학 기술도 저 바탕이 세워진 이후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쉬타인 조차 아직 단위명으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영국이 중세의 어둠에서 현대 빛의 세계 과학으로의 문을 먼저 열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팍스 브리타니카는 존재했어도 팍스 게르마니아는 없었던 겁니다.
      또한 팍스 브리타니카를 이은 것은 적대 세력이 아닌 동일 계통인 팍스 아메리카나.
      독일은 내부 민주화 역량에서 결정적으로 세계 패권국이 될 자격을 상실했고 최종 패배했습니다.
      중국도 그 부분이 바뀌지 않는 한 패권은 어림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전세계가
      무식한 깡패가 대장질 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테니.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2

      정리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약했던 민주주의 씨앗이,
      근대 이후 대서양 양편에서 입헌군주정과 공화정으로 되살아난 것이 영국과 미국.
      워싱턴에 그래서 쌩뚱 맞은 로마식 건축물이 많을 수도. 붕괴된 고대 로마 공화정의 2000년 후 부활.
      영국은 13세기 대헌장으로부터 오랜 세월 점진적 내부 민주화가 먼저 달성되고,
      그 민주화 바탕으로 내부의 헛된 에너지 낭비를 막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공동체 분위기 아래서,
      오늘날의 세계 표준을 장악하게 되는 창조성이 정치만이 아닌 다양한 분야에서 폭발하게 되었다는 것.
      프로이센식 개발독재, 소련식 개발독재, 중공의 개발독재,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개발독재 그 모두와는 차원이 다른
      선 민주화, 후 경제 성장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만든 원조 세력이라는 것.
      선 민주화의 위력은 공동체 내부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혁명과 같은 내부에서의 대규모 유혈이라는
      헛된 에너지 낭비를 막고, 더 다양하고 생산적인 부분에 창조성이 폭발하도록 한 결정적 방아쇠라는 것.
      개발독재 수준으로는 결코 세계표준 확립은 불가능.
      개발독재가 다다를 수 있는 최선은 재빠른 추격 정도라는 것.
      그렇게 성취한 재빠른 추격 조차도, 내부의 민주화 역량이 뒤따르지 않으면 결국 붕괴된다는 것 .
      경제성장 하면 저절로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당한 왜곡일 수도.
      개발독재를 이끄는 세력들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서 그런 왜곡 선동을 할 가능성이 큼.
      인류의 지난 수 백년의 역사를 볼 때 개발독재식 국가들이 세계 패권에 실패한 이유는 세계가 본능적으로 거부한 것.
      무식한 깡패에게 당하기는 더 싫다는 거부를 극복할 수가 없었던 것.

    • @user-fk8lo2xn8d
      @user-fk8lo2xn8d Před 4 lety +3

      @@scz8333 선생님 잘못했어요...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강그래님, 마켓가든 관련 동영상 12개 첨부한 새 글을 올렸으니 최신순으로 검색해보시길.
      패전한 전투를 저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왜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패했어도 전쟁에선 승리하는지,
      참전 군인들을 국가가 어떻게 대우하는지, 저들의 군사매니아들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저들이 왜 세계를 좌지우지 했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user-yt5jb9zx6q
    @user-yt5jb9zx6q Před 4 lety +1

    101공수사단만 그나마 해야될일 제대로 했네;

  • @rlee4805
    @rlee4805 Před rokem +4

    아군 듁엿던 작전..

  • @user-na7087ul
    @user-na7087ul Před 4 lety +1

    미 101 공수사단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이 있던 곳 아닌가?

  • @user-vb9dz4tq8n
    @user-vb9dz4tq8n Před 4 lety +2

    저 시기 몽고메리의 환생이 아베인가??

  • @Kampfgruppe9260
    @Kampfgruppe9260 Před 4 lety +1

    파이퍼전투단

  • @user-ir5jx9hy7o
    @user-ir5jx9hy7o Před 4 lety +5

    몽고메리가 왜 유명한지 이해가 안가!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5 měsíci +1

      롬멜을 이겼으니까.
      다만 일대 일의 승부가 아닌
      말 그대로 다구리를 쳐서 이긴 것이니...........

  • @TheMirhunter
    @TheMirhunter Před 2 lety +9

    오류가 좀 있네요
    연합군 사령부가 아니고 몽고메리가 혼자 급해서 들고나온 작전임. 미군은 사실 FM대로 천천히 가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독일 전선이 쉽게 밀리자 모든 공이 미군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한 몽고메리 삽질임. 그 때문에 미군도 아닌 영국군 공수부대가 가장 깊숙한 독일군 지역인 아른헴에 들어간거. 또 하나 독일 기갑 부대가 네덜란드 지역의 공격을 예상하고 주둔한거 아님. 동부 전선에서 엄청 구르고 온 SS 부대의 리빌딩을 위해 아른헴에 주둔중이었음.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2

      몽고메리 혼자 들고나온 작전이었어도, 연합군 사령부가 동의하지 않았으면 실행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늘어진 보급선 때문에 연합군의 진격이 정체된 상황에서, 미군측은 전체 전선에서 고르게 전진하다고 주장했고,
      영국측은 1곳을 집중 공격해서 돌파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이 성공하면 44년에 종전, 실패하더라도 전선이 거기서 정체되는 정도.
      --------------------------------------------->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도박해 볼만했기에 아이젠하워가 OK 했을 것.
      --------------------------> 그 논쟁에서 미국이 밀린 겁니다. 미국측이 논쟁에서 이길 수가 없는.
      ---------------------------> 미국측이 1 곳 뚫자고 주장했다면, 당연히 물주인 미군이 공세 임무를 맡았을 것.
      ---------------------------> 영국 요구대로 작전이 진행되었기에, 최전방 가장 위험한 곳은 영국 공수부대가 투입된 겁니다.
      영국군 최대급 패배에 마켓가든이 포함되죠.
      하지만 그 패배는 전선이 붕괴되는 패배가 아닌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그 지점에서 멈추는 정도.
      마켓가든 연합국 총 인명 피해, 영 + 미 + 폴 전체의 전사 + 행불 + 포로 = 약 18,000명
      영 공수부대 전사 약 1,100명 + 영 30군단 전사 약 5,500명, 영국군 인명 피해 최대 발생은 공수부대 포로.
      2차대전 다른 국가들 대패와 비교할 수 없고, 세계대전 아닌 한국전쟁에서도 찾기 그리 어렵지 않은.
      영국군은 아무리 삽질하고, 대패해도 잘 안 죽습니다.
      몽고메리가 아무리 삽질로 북아프리카 + 노르망디 + 마켓가든 삽질과 패배했어도 그 것 다 포함해도,
      2차대전 전 기간 민간인 포함 총 사망 약 45만 = 군인 약 40만 + 민간인 약 5만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미군 캐서린 패스 전투와 영국군 빌레르 보카쥬 첫 교전 비교 ---------------> 롬멜의 마지막 승리와 비트만-영국군 첫 교전
      1. 캐서린 패스(협곡) 전투 (43년 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 미군의 데뷰 시기)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미군 183대, 독일군 34대
      인명 피해 (사망 + 부상 + 포로 ) ----------------------------------------------> 미군 약 10,000명, 독일군 약 2,000명
      이 전투가 롬멜의 마지막 승리.
      이 전투 비슷한 시기 롬멜의 튀니지 최후 방어선 마렛라인이 영국군에게 돌파.
      마렛라인 방어전에서 롬멜이 영국군에 대한 선제 기습을 펼쳤지만, 영국군의 대전차 함정에 빠져 공격했던 전차들 거의 전멸.
      마렛라인 돌파당한 다음 후퇴한 롬멜, 포로될 위험 때문에 본국으로 송환됨.
      (무능한 몽고메리, 이유가 뭐건 롬멜과의 전투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반면 패튼은 롬멜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롬멜은 몽고메리 등장 전 영국군에게 승리했지만, 그 이후 엘알라메인-튀지니-노르망디 모두에서 결국은 패배.)
      (전쟁은 스포츠 경기나 게임이 아니죠. 압도적으로 불리한 여건 때문에 롬멜이 패했지만 전쟁은 그런 겁니다.)
      (매우 드물지만 압도적 불리함을 극복한 징키즈칸, 한 줌 잉글랜드가 대영제국 팽창. ---------> 독일은 그런 급이 아니었던 것.)
      이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호되게 당해서 지휘관 교체됨.
      새로 부임한 미 기갑부대 지휘관이 패튼이며 43년 초에 북아프리카에 등장.
      물론 독일군과 제대로된 전투 경험 없는 상태로 43년 5월 독-이 추축국 25만 병력 항복.
      43년 5월 독-이 25만 항복할 때 까지 미군은 프랑스 북아프리카 식민지군과의 소규모 교전, 독일군에겐 참교육 당한.
      2. 미하일 비트만의 매복 기습 첫 교전
      격파된 전차 및 차량 -----------------------------> 영국군 전차 약 15 (크롬웰10, 파이어플라이4, 셔먼1) 하프트럭등 차량 약 18
      독일군 전차 11 (4호 전차 5대 완파, 타이거6대 기동불능 그중 타이거 3대 회수)
      (첫 교전 당일 인명 피해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군요. 일단 생략합니다.)
      성능 차이 압도적인 상태에서,
      매복 기습당해 그것도 회피 기동할 수 없는,
      좁아 터진 한 줄로 이어진 진입로 상에서, 맨 앞 선두와 후방이 선제
      기습당해, 오도 가도 못하고 독일군에게 먹이감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 결과.
      (마켓가든 당시 영국 30군단 기갑부대 전진했던 좁은 통로와 유사한, 규모에선 작은 마을 진입로라 더 좁은)
      멍청하기만 해서 기습당했겠습니까?
      공격하는 측에선 매복 기습당할 위험한 지역이라도,
      누군가는 선발대로 목숨 걸고 진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들어가면 군대가 아니죠.
      캐서린 패스 전투와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님들은 비하일 비트만에게 농락당한 영국군 싸늘한 시선으로 비웃을지 몰라도, 저 조건에서 저 정도 우습게 보지 말길.
      캐서린 패스에서의 미군은 그냥 완전 쌩초자 그 자체였습니다. 믿는 것도 없이 자신감 충만 만땅으로 전진하다 전멸급 패배.
      미하일 비트만과의 영국군 첫 교전이,
      영국군이 매복 기습하는 입장이었다면 우수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피해 급증했을 것.
      (그런 상황에선 실제 전투 상황에서 타이거 6대 기동불능을 고려할 때, 재수 없으면 비트만도 첫 교전에서 전사할 위험도 있죠.)
      첫 교전에서 영국군이 저렇게 당했지만, 결국 타이거 탑승했던 비트만은
      얼마 후에 영국군 매복에 당해 전사하면서 이 전투는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패배로 종결됩니다.
      타이거를 격파할 방법은 정면 승부는 불가능하고 타이거 측면이나 후방으로 숨어서 접근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전투가 영국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아니면 독일군 패전사에 속해야 할까요?
      전투의 첫 시작은 영국군이 패했죠, 하지만 전투의 최종 패배는 독일군임이 분명한데, 전투의 일부
      첫 교전 상황만 강조하면서, 그것도 장비의 차이 및 지형적 조건 그리고 누가 매복 기습했는지 여부 상관 없이,
      독일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다고만 판단하며 이 전투를 바라본다면 뭔가 대단히 착각하는 겁니다.
      (첫 교전에서의 매복 공격은 유능, 매복에 당한 것은 무능이 아닙니다. 그냥 주어진 초기 조건 성격.)
      저래서 노르망디 상륙전 작전 계획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했던 겁니다.
      미 기갑부대의 이전 캐서린 패스 전투 등을 고려했을 때 햇병아리 미군에게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기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측도 자존심은 상했겠지만, 어쩔 수 없었기에 그런 작전 계획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패튼은 저 때까지 독일군과 실질적 교전을 해본 적도 없었고.)
      현명한 미국이 이끌고 주도하고, 영국은 찍소리 말고 따르기만 했다면? --------------------------> 그럴 상황이 전혀 아닙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깨진다면 롬멜 신화 아닌, 패튼의 코브라 돌파 신화가 먼저 깨집니다.
      czcams.com/video/34oR2D1GVU4/video.html
      BREAKOUT from NORMANDY: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패튼은 북아프리카에서 별다른 전과 없었고, 노르망디 코브라 돌파 순간에도 전투 지휘하진 못했고.
      첨부한 동영상에 달린 댓글에 그런 점에 충격받은 이들의 대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코브라 돌파 시점 까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한 상세한 소개 영상인데, 제목은 패튼의 코브라 돌파지만
      내용적으로 패튼은 거의 언급도 되지 않고, 패튼 아닌 브래들리 내용이 거의 다라, 혼란스러워하는 댓글들이죠.
      44년 7.25일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작전 개시
      44년 7.28일~7.31일, 독일군 방어선 붕괴 시작되고. 7.31일, 브래들리 미1군 보카쥬 벗어나 프랑스 내륙으로 돌입.
      브래들리 미1군 코브라 돌파 이후 신규 편성된 미3군을 패튼이 지휘 시작. 즉 패튼은 코브라 돌파와 아무런 상관 없는.
      브래들리 미1군의 코브라 돌파, 영국군이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의 80% 및 거의 모든 타이거 전차 몸빵하며
      고착 분쇄 공세를 펼칠 때 독일의 모든 예비 전력이 영국군 지역으로 투입되어 미군 담당 지역 독일 방어력이 매우 취약해져.
      패튼은 할리웃 선전 최대 수혜자 성격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 미 기갑부대의 사실상 첫 데뷰전인 캐서린 협곡 전투에서 미군 거의 전멸당하자,
      새로운 지휘관으로 패튼이 교체 투입 시점 43년 2월경. 43년 5월 튀니지에서 독-이 추축국 25만 항복까지 별다른 전과 없는.
      시칠리에서도 미군은 별다른 전투 없이 팔레르모 입성,
      거의 지프 타고 손들면서 팔레르모 입성.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에서 격렬한 전투하며 전진한 영국군과 달리.
      공황장애로 의무대 있던 몸 멀쩡한 사병 뺨싸대기 날린 것 언론보도로 사과 및 문책되어 일선 지휘에서 배제. 3군 부임 전까지
      노르망디 상륙일만 아니라 그 후 약 1달 후까지도 노르망디에 없었죠. 영국에서 가상 페이퍼 부대 지휘관으로 대기.
      코브라 돌파되는 시점까지도 전투 지휘를 하지 못하고 재편성되는 되는 3군의 지휘관으로 돌파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패튼이 실질적으로 능력을 보인 것은 벌지 전투가 처음입니다.
      하지만 할리웃 영화 패튼대전차군단, 패튼이 북아프리카, 시칠리, 노르망디 다 한 것 같은 착각 들 정도.
      패튼은 사실 롬멜과 단 1번의 교전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할리웃 효과로 패튼이 롬멜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된.
      롬멜은 패튼과는 다릅니다. 적당히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롬멜은 패튼과 같은 여러 실체 없는 승리의 주인공 아닌. 국가 차원 지원에서도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제대로 지원해주지도 못했고, 지원할 능력도 안되었던 독일 최고 지휘부와 독소전 투입 일부 장성들은 롬멜이 독일의 대전략에
      혼선을 가져와 전쟁 수행을 어렵게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롬멜 신화 깨부수기의 시발점임도 인정해야만 할 것.
      롬멜 신화는 적인 영국군 장병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롬멜 신화 깨부수기는 롬멜의 조국 독일에서 싹이 텄습니다.
      롬멜은 2차대전 파탄난 독일의 대전략 수립할 위치에 없없고, 야전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패했던 것.
      부족한 보급을 기다린다고 온다는 아무런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 공세로 토부룩 함락해 대량의 물자 탈취해 엘알라메인
      까지 진격. 엘알라메인을 뚫고 수에즈까지 진격해 수에즈 이집트에 집적된 대규모 물자까지 확보하려 했던 것은 전략적 오판 아닌
      주어진 결핍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
      그런 롬멜에게 전략적 식견 부족 운운은 것 지나친.
      독일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탄을 야전지휘관에게 묻는 것은 책임 전가이며 비합리적 태도.
      코브라 돌파 영상 관련 댓글 일부 펌.
      ( John Emerson
      3개월 전
      Interesting. General Patton was never mentioned in this video.
      22
      Carl Welty
      Carl Welty
      2개월 전
      Good point -
      2
      Todd Is god
      Todd Is god
      2개월 전
      Because his command of the 3rd army had to wait until they were activated, which was immediately after Cobra
      6
      John Emerson
      John Emerson
      2개월 전
      @Todd Is god Yeah, "General Patton's Operation Cobra" and he isn't even there yet. Mis-titled I guess.
      7
      Jc Wheeler
      Jc Wheeler
      1개월 전
      @John Emerson 997ot
      Ronnie Bishop
      Ronnie Bishop
      21시간 전
      He wasn’t involved with this operation it was Bradley all the way. Patton was in England. )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노르망디, 미군의 코브라 돌파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czcams.com/video/p-9w2J5s0xU/video.html
      코브라 돌파 직전 까지, 독일 기갑부대 80% 및 모든 타이거 전차는 까앵에서 영국군과 교전. 그 빈 틈으로 미군의 돌파.
      까앵 최종 함락 단일 작전에서 영국군은 약 500대의 전차 손실. 당시 영국군 총 전차의 약 35%를 단일 작전에서 손실.
      까앵 함락 때 독일군 전차 약 600대 및 독일의 모든 타이거 전차가 영국군에 붙들려 고착 분쇄되어 나감.
      당시 미군 전면에 배치된 독일 전차는 약 150대, 타이거는 없었고.
      노르망디 전역 종결 때 까지 교전국들의 최종 전차 손실.
      영국 약 1200대. 독일 알보병을 주로 상대했던 미국 역시 약 1200대 손실. 독일은 약 1300대.
      당시 미 지상군이 독일 주력을 담당했던 영국과 거의 동일한 전차 손실을 당했다는 것은 미군이 신병 수준이었기에.
      독일이 당한 전차 손실은 전차 대 전차 전투 보다는 공중공격 및 함포사격에 의해 손상당한 후 후퇴할 때 유기 자폭 많음.
      즉 전차 대 전차 전투에서 영국과 미국이 독일 전차와 겨루기는 힘들 정도의 압도적 성능 차이.
      패튼의 미군은 유능했고, 영국군은 무능했던 것 아님.
      영국군은 노르망디 전역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몸빵으로 처절하게 공격하며 독일군을 제거한 것.
      미국과 영국은 불행히도 45년 초가 되어서야 타이거와 대등하게 전투할만한 신형 전차를 전선에 투입.
      하지만 너무 늦게 투입되어 교전할만한 독일 전차 기갑부대 자체가 소멸해 별 전과 없음.
      ------------------------------------------------------------------------------------------------
      노르망디 전역 미군의 코브라 돌파에 대한 다큐 링크를 걸면 유튭에서 글이 삭제되곤 해서 간단 소개합니다.
      노인이 된 브래들리 장군의 인터뷰 및 코브라 돌파 상세한 과정을 다룬 다큐인데, 그 유튭 영상엔 수 많은 영미권의
      댓글들로 넘쳐났습니다. -------------------> 패튼이 코브라 돌파한 것 아닌 것에 놀라고, 패튼이 노르망디 상륙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
      놀라고, 그 영상 제목이 영어로 패튼의 코브라 돌파라는 어구도 포함되었는데 내용적으로 패튼은 나오지 않고 브래들리만 나왔기에
      영상 제목을 바꿔야한다는 댓글들도 있더군요. 패튼대전차군단 할리웃 영화 영향력 때문인지 미국 일반인들도 패튼이 코브라 돌파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
      흔히 패튼이 지휘한 미3군이 코브라 돌파 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패튼이 아닌 브래들리 휘하 미1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냈고 패튼은 그 이후에,
      재편성된 신규 미3군의 지휘관으로 투입된 겁니다. 브레들리의 코브라 돌파는 44년 7월 말 이루어진.
      노르망디 상륙 당일만이 아니라 상륙 후 1달이 넘어서 까지 패튼은 영국 본토에서 대기.
      코브라 돌파를 해낸 미1군 지휘관, 오마 브래들리가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직접 서술한 내용. 맨 앞 첫 구절만 우리 말로 옮기면 --------------------------------->
      (영국군은 독일군을 갈아버리기 위해 깡의 독일 기갑부대로 진입했다, 미군이 코브라 돌파를 해낼 수 있도록.)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압도적 전차 성능 차이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동안 영국군도 갈려나갔습니다. 소개된 뒷 부분을 옮기면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격 속도와 전진한 거리로 그 전투의 성공을 평가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즉 영국군의 돌파라는
      자부심을 계산하지 않고 몽고메리는 최종 작전 계획에 서명했다... ... 영국군은 인내와 자제로 그들에게 부여된 수동적 역활을 견뎌냈다.)
      -------------------------> 많은 이들은 인용한 원문 마지막 부분 주장과 같이, 군이 적진을 돌파하는
      진격 속도와 전진 거리로만 성공과 능력을 평가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적 주력을 견제-고착- 섬멸 등을 해야, 그런 돌파가 가능한.
      40년 프랑스를 항복시킨 전격전은 적 주력을 견제만 하는 뒤통수 때리는 돌파, 하지만 44년엔 견제만으로는 돌파가 불가능했던.
      40년엔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가능했지만, 전쟁 말에는 그 어떤 중무장 전차도 쉽게 뚫을 수 없이 변해버린, 게다가 전차
      성능에선 독일의 압도적 우세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갈려나가면서 적 주력을 고착-분쇄시켜야만 했던.
      --------------------------> 노르망디 전역, 당시 미군은 독일군 주력을 상대할 역량이 없었기에,
      영국군이 갈려나가면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별로 폼나지 않는 수동적 역활을 담당했고, 그로 인해 발생한
      미군 지역의 독일군 방어력 약화를 이용해 미군이 돌파하도록 상륙 전에 이미 작전 계획을 세웠던 것.
      ----------------> 오마 브래들리가 얼마나 겸손하고 사려 깊은 지휘관인지 패튼의 알려진 언행과 비교해보길.
      만일 패튼이 코브라 돌파를 지휘했고 성공시켰다면, 오마 브래들리와 같이 서술하기는 힘들었을 것. 모든 것이 위대한
      미국과 탁월한 자신의 능력으로 독일군을 분쇄한 것이라고 했을 가능성 큰.
      그렇다면 패튼은 왜 이렇게 과대 평가되고 널리 알려졌겠습니까? ----------------> 극한의 할리웃 영향력?
      또한 벌지 전투는 미국 역사상 가장 결정적 지상전 승리이기에 패튼을 미국의 영웅으로 부각시킬 필요성도 있었을 것.
      (콰이강의 다리)-(패튼 대전차군단) 두 영화는 모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지만, 영화 내용과 성격은 완전히 상반되죠.
      성조기 나부끼고 번쩍이는 별 박힌 철모에 상아 손잡이 권총의 지휘관이 2차대전 독일군 괴멸시킨 것으로 선전하는 영화가
      과연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을만한 수준인지 지극 의심스럽지만 받았답니다. 어릴 때는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역사를
      좀 알게 된 이후에 그 영화 다시 보니 참... 자잘한 것 하나 더 추가한다면, 강릉에 잠수정 침투했을 때, 소탕전 나선 우리 군 일부
      번쩍이는 계급장 때문에 저격당해 전사.
      (오마 브래들리 서술 관련 펌.
      The British drew in German armour at Caen to grind it up, to allow the Americans to break out in Operation Cobra.
      General Omar Bradley wrote.........
      While Collins was hoisting his VII Corps flag over Cherbourg, Montgomery was spending his reputation in a bitter siege against the old university city of Caen. For three weeks he had rammed his troops against those panzer divisions he had deliberately drawn towards that city as part of our Allied strategy of diversion in the Normandy Campaign. Although Caen contained an important road junction that Montgomery would eventually need, for the moment the capture of that city was only incidental to his mission. For Monty’s primary task was to attract German troops to the British front that we might more easily secure Cherbourg and get into position for the breakout.
      In this diversionary mission Monty was more than successful, for the harder he hammered towards Caen, the more German troops he drew into that sector. Too many correspondents, however, had overrated the importance of Caen itself, and when Monty failed to take it, they blamed him for the delay. But had we attempted to exonerate Montgomery by explaining how successfully he had hoodwinked the German by diverting him toward Caen from the Cotentin, we would have also given our strategy away. We desperately wanted the German to believe this attack on Caen was the main Allied effort.
      But while this diversion of Monty’s was brilliantly achieved, he never the less left himself open to criticism by over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his thrust toward Caen. Had he limited himself simply to the containment without making Caen a symbol of it, he would have been credited with success instead of being charged, as he was, with failure at Caen. For Monty’s success should have been measured in the panzer divisions the enemy rushed against him whilst Collins sped on toward Cherbourg. Instead, the Allied newspaper readers clammered for a place name called Caen which Monty had once promised but failed to win for them.
      The containment mission that had been assigned Monty in the Overlord plan was not calculated to burnish British pride in the accomplishments of their troops. For in the minds of most people, success in battle is measured in the rate and length of advance. They found it difficult to realise that the more successful Monty was in stirring up German resistance, the less likely he was to advance. For another four weeks it fell to the British to pin down superior enemy forces in that sector while we maneuvered into position for the US breakout. With the Allied world crying for blitzkrieg the first week after we landed, the British endured their passive role with patience and forbearing.)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Secret 1944 Mission to Assassinate Germany's Panzer Leaders :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 제거 공습
      czcams.com/video/c844En8XvC4/video.html
      미군이 롬멜 공습해 전선 이탈시키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핀포인트 공습으로 노르망디 전역 독일 기갑군 최고 지휘부 제거한 적 없습니다.
      미국이 가지지 못한 영국의 정보능력, 브레칠리 파크의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얻은 정보 울트라.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역습인 모르탱 반격과 독일 기갑부대 최고 지휘부의 위치 모두 알아냈습니다.
      영국 제2전술 공군의 전술기들이 노르망디 전역의 독일 기갑부대 지휘부를 어떻게 제거했는지 보기를.
      동영상 4분50초 이후 참조 (영어 자막만 제공됨)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
      6월8일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위치를 파악하고, 6월10일
      영국 제2전술공군은 호커 타이푼 42대, B-25 72대, 호위 스핏파이어 4개 편대 동원해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를 급습했습니다. 다수 지휘관 참모들이 사망하고, 지휘 통신차량등이 파손되어,
      노르망디 상륙지에 대한 독일 서부 기갑군의 반격을 하루 연기하려 했지만 지휘부 희생이 너무 커 파리에서
      새로 지휘부 구성하고 반격은 3주 연기되었습니다. 이 동영상 보니 영국은 이미 1차대전 때도 독일 빌헬름2세를
      공습으로 암살시도 했던 적이 있었군요. 북아프리카에서 롬멜 암살은 공습 아닌 특수부대 투입으로 시도했지만,
      롬멜은 행운으로 마침 숙소에 없어서 실패. 하지만 노르망디에서 독일 서부 기갑군 사령부 기습은 대성공.
      영국이 울트라 정보로 독일의 모든 방어 계획을 훤히 알고 있었지만 독 기갑군 상대 지극히 어려웠죠.
      적 정보를 아는 것과 적을 물리치는 것은 별개인 겁니다. 특히 전차전에서 전차의 성능 차이는 정보로 해결 안됨.
      격투기 헤비급 챔피온 상대로 그의 약점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가 격투기 선수가 아니면 아무 소용 없는 그런 상황.
      영국은 독일 암호 해독으로 독일의 모든 방어계획 반격작전을 파악하고 대응했지만, 그 대응에서 일선의 전차병들과
      군인들은 몸빵으로 떼워야 했습니다. 그래도 확연한 이점은 있었죠. 독일군 기갑군 주력이 까앵에 집결하고, 모르탱
      반격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전차 함정을 파서 팔레즈 포켓으로 유인하고, 미군이 그 빈틈을 노려 돌파하도록
      미군에게 공세 개시 시점을 지정해준 것.
      미국이 2차대전 물주인 것 분명합니다.
      영국 보다 북서유럽 상륙군 최종 병력이 3 :1로 훨씬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이후의 전투를 거의 다했고 영국은 들러리라고 하긴 힘들죠.
      미군은 파리를 점령하고 그 쪽에서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베네룩스 3국을 경유하면서 해안가를 끼고 전진했죠.
      이유는 독일의 v-1, v-2, v-3 기지 제거와 해안 항구 확보로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서.
      v-3는 초장거리 대포입니다. 포신 길이가 과장 좀 보태면 100m대. 영국 입장에선 최우선 목표.
      영국 본토가 독일 로켓과 장거리포로 타격당하던 시기라.
      영국 공군이 5톤, 10톤 짜리 블록버스터로
      우선 독 로켓 기지 예상 지점 폭격하고, 그 뒤에 영국 지상군이 점령해서 위협을 최종 제거.
      노르망디 상륙 때 동원된 해군 미군이 많겠습니까? 아니면 영국이 압도했겠습니까? 인공항구, 해저송유관도.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펜(영어 발음으로 안트워프) 점령을 영국이 해야 더 합리적이죠. 모든 유지보수 인력은
      미국이 아닌 영국이 담당하기 더 편하니까.
      또한 독일이 그런 중요한 항구 지역 순순히 내줄 이유 없으니, 항구와 항구 인근 해안과 강 지역에서
      소규모의 상륙전도 전개되었습니다. 항구 점령한다고 바로 사용할 수도 없죠. 독일군이 다 폭파시킨 후 점령.
      그것 다 치우고 새로 항구 개통도 영국 몫이죠. 미군은 독일군 상대로 전투 주력하며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잡다한
      일들 함께 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영국 본토가 아닌 최전선의 연합군을 향한 독일의 v-2 공격 ,
      역시 대부분은 미군 지역이 아닌 영국군이 담당한 안트베르펜등 항구 지역이었습니다.
      독일의 소중한 전략 자산 v-2, 패튼의 미3군과 같은 곳 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치명적인 지역 공격.
      미영소 당시 인구 영국은 5000만이 될까 말까, 소련은 1억5천만 이상, 미국도 1억을 넘었죠.
      그 때문에 영국은 상시적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겁니다. 미국이 북서유럽에 300만 투입할 때 왜 영국은
      고작 100만 밖에 투입하지 못했는지, 왜 영국이 겨우 100만 북서유럽에 투입하면서도,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육해공 100만 병력을 여전히 남겼는지 생각할 필요 있습니다. 영국군은 44년부터 그리스에서 빨치산 소탕.
      사실 수백만 미군을 대서양 건너 퍼나른 것도 영국이 더 많았죠.
      당시 세계 최대 여객선 7만톤 8만톤급이었던 퀸메리와 퀸엘리자벳은 미군 병력 만명 단위로 운반.
      저 거대 여객선이 미국에서 출발해 대서양 건너다 침몰당했다면, 미군 수 만명이 한꺼번에 떼죽음 당하는 것.
      패튼 북아프리카에서 특별히 내세울 전투 없습니다.
      패튼 아니 미 지상군 전체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실 마지막 순간 숟가락만 얹은 겁니다.
      미공군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나름 역활했지만.
      1943년 5월 튀니스 함락 까지 미 지상군과 해군 별로 한 일 없습니다.
      영국 해공군은 몰타 방어 및 지중해 제해권, 영 지상군의 보급 유지와 지원 엄청난 전투치뤘죠.
      영국 지상군도 탁월한 롬멜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결국은 승리했습니다. 보급을 유지하는 것도 능력.
      롬멜이 보급만 충분했다면 승리?
      영국의 보급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면 그런 주장 할 수 없을 것.
      추축국 해상보급선은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 겨우 250마일, 영국은 최단 지중해 직항로
      지브롤타-몰타-알렉산드리아 3,500km, 전황 악화로 직항로 사용 못할 땐 아프리카 우회한 수만km 지구 차원.
      최단 3,500km도 집결 후 출발점인 지브롤타 기준입니다. 실제로는 영국-캐나다-미국에서 출발한 선단임을 고려해야.
      영국의 해상보급은 룰루랄라 진행된 것 아니죠.
      페데스탈 몰타 호송선단 보듯 어마어마한 자원이 투입된 겁니다.
      사실 2차대전 영국의 전쟁 수행, 최전방 전투 투입 아닌 보급 지원 운반에도 엄청난 자원 소모.
      대서양의 유보트전에서 유보트 1척 잡기 위해 미국과 영국은 함정과 항공기 합해서 약 100대 단위가 투입.
      되니츠 회고록, 전황 악화로 유보트를 철수시켜야 했지만 철수시킬 경우, 대잠전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과 자원이
      독일 침공군의 전차 항공기 병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보면서도 잠수함전 지속했다는 내용.
      북아프리카의 독일 이태리 추축군은 영국군에 의해 격멸되었습니다.
      미군은 횃불 상륙 때 나타났고, 전투다운 전투 해본 적 없고, 캐서린 패스의 미 기갑부대 데뷰전은 전멸.
      미 기갑부대가 캐서린 패스에서 노련한 독일군에게 전멸당할 무렵, 영국8군은 튀니지 거점 마랫 방어선을 뚫었고.
      시칠리에서도 패튼은 거의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에트나 화산 동부지역을 전투하면서 전진했고, 패튼은 지프 타고 손흔들면서 전진.
      패튼은 또한 노르망디 상륙에 직접 참여한 적도 없습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에 추가 투입되었습니다.
      패튼은 기만 유령부대 지휘관으로 도버에 있다, 상륙이 성공한 이후 투입됩니다.
      패튼이 일선에서 배제된 이유는 패튼대전차군단 영화에도 나오듯 사병 뺨싸대기 날린 후 징계탓도 있었고.

  • @danggi2
    @danggi2 Před 3 lety +2

    영국군 제 1 공수사단은 잘못 강하 한게아니라, 원래 부터 냑하설정지였음. 당시 영국군 공수사단은 낙하지점 찾기가 힘들었음. 다리 남쪽은 지형이 너무 부드러워어서 글라이더 손실이 컷고 북쪽으로는 독일군 비행장 대공포 진영때문에 힘들었음. 그래서 다리에서 10km 넘는 지점에서 낙하지점을 설정함... 정정 부탁함.

    • @man_outdoor
      @man_outdoor Před 3 lety +4

      왜 니가 말하면 정정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냐 씹덕아

  • @yong-gilchoi8614
    @yong-gilchoi8614 Před rokem +7

    냉정하게 지난 2차대전 역사를 되짚어보면 어리버리한 영국군과 역시 마찬가지로 얼빵한 미군이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패배하기란 불가능했다. 소련군과 전투에서 거의 실전능력의 대부부을 잃어버렸는데도 그런 독일군조차 영국군 미군에게는 버거운 상대였었다. 그만큼 독일군이 무시무시한 강철군대였었고, 그런 무적의 독일군대를 패퇴시키는데는 소련군의 인류최대의 희생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없었다면 독일의 패망은 불가능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은 숨통을 죄여지기 시작되었다. 소련군을 폄하하고 그 공헌 공적을 폄훼하는 것은 친일 식민반역자들의 농간때문이다. 여기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소련군의 공헌을 제대로 인정할 때야 비로소 역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는 독일군대의 진격에 환영하고 점령에 협력했었던 흑역사가 있었다. 우크라이나 나찌들은 독일군의 유대인 멸절에도 적극 협력해서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어마어마한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 @doori2286
    @doori2286 Před 3 lety +5

    기습작전은 완벽하게 노출되지 않고 적의 후방에 침투하는게 목적이지만
    현지 지상군의 방어를 뚫기가 쉽지 않아서 대부분 소모품으로 전락되는게
    진실입니다.
    영화에 보이는 영웅적인 전투가 아니라 처절하게 당하는 스토리가 대부분이지요.
    특수부대는 그냥 전쟁의 소모품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현대 미군은 빈라덴 사살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오랜기간 동안 정찰,탐색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기습을 하지요. 완벽한 각본을 짜서 작전해도 사상자는 나오고
    작전이 끝난 뒤에는 이미 항복한 빈라덴을 기습한것처럼 각본을 만들었다는 일부 비난이 나옵니다.
    실제로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은 이미 체포해놓고 기습해서 잡은것 처럼 쑈를 하기도 했지요.

    • @N0tAngryMan
      @N0tAngryMan Před 3 lety +1

      @@HS17J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5 měsíci

      히틀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공수부대의 생명은 불시의 기습이야.
      그러지 못하면
      평범한 보병만도 못한 존재지.'

  • @joonanlim2121
    @joonanlim2121 Před 10 měsíci +4

    몽고메리는 폴란드 공수사단장에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고 ,그로인해 후에 연금까지도 못받게 되고 힘든 말년을 보내게 된다. 몽고메리는 우리의 누구처럼 남탓으로 그 자리를 지키던 졸렬한 놈이었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5 měsíci +1

      하지만 몽고메리는 죽은 뒤에 국립묘지가 아닌 지 고향마을 공동묘지에 묻히는 치욕을 당하고
      소사보우스키 장군은
      그래도 네덜란드 정부 최고훈장인 황금사자상 훈장을 받고
      폴란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요.
      그것도 바웬사 대통령이 직접 추진해서 말입니다.

  • @danggi2
    @danggi2 Před 3 lety +2

    그리고 80%가 아니하 90% 입니다. 자료 확실아 확인하고 올리시기바랍니다.

  • @user-ic2mr2yt5l
    @user-ic2mr2yt5l Před 3 lety +5

    머나먼 다리 영화 감상평 3시간 부족 런닝타임 6시간 런닝타임 해야 제대로 표현 가능한 소재데 미리 패전산 해설 듣고 영화 이해하지 그냥 보면 너무 중구난방 헷갈림 패배한 전투지만 연합군 영웅군이 나타나서 독일군 병사 물리치는 유치한 연출 보기 민망할 정도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머나먼 다리 영화 감상평 3시간 부족 런닝타임 6시간 런닝타임 해야 제대로 표현 가능한 소재데 미리 패전산 해설 듣고 영화 이해하지 그냥 보면 너무 중구난방 헷갈림 패배한 전투지만 연합군 영웅군이 나타나서 독일군 병사 물리치는 유치한 연출 보기 민망할 정도)
      -----------------> 영화 어느 부분이 영웅군이 나타나 독일군 물리치는 유치한 연출 보기 민망했습니까?
      -----------------> 영화 어디에 실제 패배를 승리나 영웅적 투쟁으로 미화했습니까?
      -----------------> 님이 정말 ' 머나먼 다리' 영화를 제대로 봤는지 의문이군요.
      머나먼 다리는 사실상 반전 성격 영화입니다.
      머나먼 다리, 할리웃 단독 작품 아닌 미영 합작 영화.
      숀커네리 등 영국 배우도 주연급으로 참여했으며, 승리하지 못한 전투를 매우 시니컬하게
      자국군 최고 지휘부를 비판하는 장면들이 거리낌 없이 나옵니다. 사실 그러기는 결코 결코 쉽지 않다는 것 인지하길.
      영국군 관련 전쟁 영화인, 머나먼다리-콰이강의다리
      ------------------------> 전형적인 할리웃 전쟁 영화인, 패튼대전차군단과 성격이 너무나 다릅니다.
      ------------------------>유치한 연출이 있었다 해도, 과연 어떤 영화에 있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보길.
      이 글 다음에 마켓가든 관련 자료들과 패튼 및 한국전쟁 국군 관련 자료들 소개하겠습니다.
      국민방위군, 1951년초 한겨울 중공군 남하 때 보충역 징집된 50만 병력 중,
      추정 약 10만 병력이 비전투 손실로, 전시 발생한 대규모 국방비리로 식량과 물자 빼돌려져,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보도연맹사건과 휴전 후 남북의 포로 교환 과정에서 생환 국군포로 심문 사망건 등 확인해보길.
      패튼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어떤 실전 경험을 했는지도 소개하겠습니다.
      -----------------> 대한민국 정부와 군이 한국전쟁에서 벌인 삽질, 머나먼 다리 영화와 같이 전세계에 뿌려지는 날이 올지도 생각하길.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1. 2014년 마켓가든 70주년 아른헴 행사 : 폴란드 공수부대 추모전, 폴란드 참전 노병들과 현역 군인들도 참석 (동영상 7개)
      czcams.com/video/SbZmAaHnF-I/video.html
      (아래 3번 동영상엔 기념비 옆에서, 소총에 착검한 폴란드 현역 공수부대원들이 군례를 표하고 있음.)
      1944년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이끌던 그 폴란드 공수부대, 또는 계승한 부대가 폴란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폴란드 공수부대 지휘관이 부대원과 함께 기념 행사에 참석 인터뷰도 하는군요.
      1944년 투입되었던 폴란드 공수부대 노병들과
      가족, 후손들이 영국 공수부대 노병과 대화도 하고. 폴란드인이 제작한 영상 같음.
      영국과 폴란드 공수부대가 당시 강을 건너 후퇴하는 과정도 노병이 보트에 승선 재현하고 있고.
      비록 전투에선 패배했지만, 패배만으로 남기지 않고 참전자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며 거듭나고 있습니다.
      패전을 저렇게 기리기도 어렸습니다. 많은 국가들의 경우 보통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편.
      특히 오늘날 폴란드군에서 마켓가든은 아마도 그들 군 역사에서 가장 명예로운 전투로 여겨질테고.
      2. Remembering The Battle of Arnhem, September 2014 : 위 영상과 같은 해, 70주년 공식 기념행사. (영 폴 네 미 함께)
      czcams.com/video/WoV28acPDLU/video.html
      유모차에 탄 증손자녀와 휠체어에 앉은 노병 증조 할아버지가 함께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행사 참석자들과 시민들이 따뜻하게 환영하는 모습, 걸을 수 있는 노병은 걷고, 휠체어에 의지한 노병도 있고.
      3. Airborne Commemoration 2016 :
      72주년 기념식, 기념비 쪽에서 본 헌화 모습, 1분45초 이후에 착검한 폴란드 공수부대가 예의를 표하는 장면 잠시 나옴.
      czcams.com/video/hBwNjRCrCGM/video.html
      몸이 쇄약한 노병들이 거수 경례 조차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이고,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헌화하기도 하고.
      할아버지와 함께 저런 행사에 참석한 소년들은 훗날 군인이 될 가능성도 크겠죠.
      4. Oosterbeek 2014 : 2014년 70주년, 네덜란드 지명 딴 이름, 넓은 시야로 바라 본 70주년 기념식 영상.
      7분10초 이후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국기 게양식. 동영상 앞 부분엔 현역 폴란드군 기수 입장을 볼 수 있음.
      미국 국기 게양식은 없는 대신, 전투 관련 각국 군부대 기수단 입장할 때 미국 국기가 함께 입장하는 형태로 보임.
      czcams.com/video/2lkQAkaeqjs/video.html
      5. Heroes Of Arnhem At The Palace : 버킹검궁에서 열린 아른헴 참전 영국 공수부대 훈장 수여식 및 행진.
      1944년 투입된 영 제1공수 부대원들, 그 위 직급인 브라우닝 장군,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등 400명 이상 참석.
      czcams.com/video/39yUhZU_vtY/video.html
      6. Major Cain The One Man Tank Destoyer | Medal of Honor Monday : 아른헴 전투, 빅토리아 훈장 수여자.
      5명의 VC 수여자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 독일 전차 격파, 부상당함. 기념 우표 까지 발행되었군요.
      그는 6파운드 대전차포와 피아트 대전차화기를 이용해 적 전차 6대를 무력화시킴, 그 중 4대가 타이거 전차.
      czcams.com/video/soEggNTQoQ0/video.html
      7. Victory March Of The 51st Highland Division (1945) | British Pathé
      영 30군단 51 하이랜드 사단, 독일 브레멘하펜에서 victory march : 군단장 호록스 장군, 영화 속 인물과 비슷
      머나먼 다리, 출연 배우들 생김새도 실제 인물들과 비슷 : 영 1공수사단장, 30군단장 등.
      czcams.com/video/QcA4ffFNiAk/video.html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자유폴란드 정부는 1939년 런던에 망명했지만,
      전쟁 승리 후 귀국하지 못하고 끝까지 공산 폴란드 정부와 대립했습니다.
      바웬사의 자유노조가 승리해 민주정부가 들어선 직후,
      런던의 자유폴란드 망명정부의 깃발과 자유폴란드군의 정통성을 전달하고 해산했습니다.
      현재 폴란드 군의 정통성은 소련과 함께 싸웠던 공산 폴란드군이 아닌, 자유폴란드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철의 장막 붕괴 후 폴란드는 나토에 가입하고
      나토의 군사 훈련에 특히 영국군이 지상군과 공군으로 꽤나 자주 투입되어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게시판에서 많이 언급되는 비운의
      폴란드공수부대 지휘관 소사보프스키 장군 역시 전후 상황 때문에 귀국할 수 없었고,
      그와 자유폴란드군의 희생이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조국에서 인정받고 폴란드의 진정한 영웅이 되었죠.
      물론 대부분은 사망한 이후, 거기다 추가로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나.
      시간이 많이 늦어졌지만 영웅들은 결국 영웅이 됩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더욱 영웅을 부각시키죠.
      공산 폴란드 정부는, 자유폴란드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일과 소련이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이후, 폴란드군 장교단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한
      소련측에 공산 폴란드 정부는 항의하기는 커녕 진실을 감추기만 했었죠. 공산 폴란드 정부의 위선은
      결국 민주정부 들어선 이후 다 드러나게 되고. 그 사건만으로도 폴란드의 정통성은 자유폴란드 정부에 있고.
      영국항공전, 이태리 전선의 몬태카지노, 아른헴 등이 자유폴란드군이 분전했던 대표적인 전투들이죠.
      거기다 독일 에니그마 암호 해독 최초로 성공한 것도 폴란드였고 폴란드 망명정부가 영국에
      제공한 자료들로 부터 영국의 독일 암호 해독이 시작된 겁니다.
      영국은 폴란드에 큰 빚을 진 셈이죠.
      영국항공전의 유명한 폴란드 공군 에이스는 전후 귀국해
      폴란드 공산정권 하에서 공직을 맡으며 전후 재건에 참였지만, 공산정권으로 부터
      서방 스파이로 몰려 엄청난 고난을 겪기도 했었죠. 그런 이유로 많은 폴란드인들이 귀국할 수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1

      6.25 때 북괴와 중공 만행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삽질 역시 대단했습니다.
      역전다방에서 소개된 미국의 태평양전쟁 보다는 현재 진행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나마 한반도 상황에 더 유사한.
      모두 슬라브 계열로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여러 부분에서 겹치며 동일한 기원에서 건국되었기도.
      러시아의 기원 루스는 슬라브 주도 아닌 바이킹이 주변의 슬라브를 규합해 건국되었고, 루스의 중심부는 최종적으로는
      비옥한 현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옮겨졌습니다.
      저런 역사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2차대전 미국 아닌,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이 더 우리 한국전과 유사. 하지만 차이점도 큽니다.
      1. 침략당한 측의 최고 지도자 처신 : 코메디언 출신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영웅적 리더쉽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우리 이승만 대통령은 승리하고 있다고 거짓 라디오 방송 틀어놓고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2. 더 본질적 문제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거슬러 거슬러 올라면 같은 기원으로 수렴하는 정도지만, 한반도의 남북은 그냥 한 형제.
      이런 차이 때문에 한국전쟁을 소재로 역전다방 영상의 2차대전
      미국 마블의 방패 영웅의 채권 기금 홍보나 이오지마 깃발 사진 상징식 긍정적 활용만 하기 어려운 면도.
      유리한 자료만 취사 선택해 기승전-정치편향 ---------------------> 너무 그러면 한반도의 우리 민족 정말 암울해지는 겁니다.
      한국전쟁 때 우리 대통령-군-정부가 벌인 삽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칼날을 들이대는 대한민국이어야 미래 희망이 있습니다.
      1. 보도연맹 사건.
      한국전 터지기 전 대한민국 내부에서의 사상전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좌익을 전향시켜 반공 데모 시위에 동원하다가, 한국전쟁 발발하고 전황 안좋아지니까,
      불안-초조-공포에 휩싸여 전향한 좌익인 보도연맹원들 대대적으로 체포, 체포로도 너무 불안해서 선제 대량 학살로 제거.
      그렇게 희생된 이들 명단은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훗날 책임질 일이 될 수도 있으니 기록 남기지 않고 처형.
      추정치로 선제 예방 학살로 처형된 인원은 단위가 10만대, 정확히 10만인지 20만인지 모르는.
      보도연맹 희생자들 유골 발견 뉴스는 몇 년에 한 번씩 뉴스에 나오며 현재 진행형.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 --------------> 일본인들이 조선인에 대해 선제 사전 예방 학살 아닌 지진 터진 이후에 학살.
      남경대학살 --------------------------------->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인들 상대로 도시 점령 과정 및 점령 완료 후 대량 학살.
      우리 보도연맹 사건 --------------------> 같은 민족을 상대로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사전 예방 학살.
      21세기 현재 기준으론 전세계적 규탄과 반인류적 범죄로 반드시 처벌되는 심각한 사건이었다는 것 명심하길.
      더 안타까운 것은 보도연맹원 모집 당시 전국에 할당량이 내려져,
      시골에선 아는 주민들 이름 공무원들이 그냥 올리기도 했고, 심할 경우에도 애들 이름도 적어 넣었는데,
      보도연맹원 체포와 예방 학살 과정에서 완전 억울하게 좌익 아닌 이들도 꽤 많이 희생된.
      실제 전향했던 좌익들 역시 억울하기는 마찬가지고.
      2. 국민방위군 사건.
      한강다리 끊고 잽싸게 튄 넘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불과 6개월 정도 후인 1951년 초 한겨울 추위 속에서 중공군 남하 당시,
      전시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국방비리가 벌어져 식량과 물자가 빼돌려져,
      보충역으로 징집된 약 50만 병력 중에서 추정치 약 10만 병력이 적과의 전투 아닌 비전투 손실로
      남쪽으로 후퇴 행군 도중에 굶어죽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서북청년단 단장 출신의 민간인이 임명된.
      너무나 황당무계한 사태가 터져 다 덮을 수는 없었고, 결국 사령관 포함 몇 명 처형되는 선에서 덮어버린.
      희생자가 너무 많이 나와 부산으로 피난갔던 정부에 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국민방위군은 해체.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보도연맹-국민방위군 사태 정도면
      일단 전시여도 내각 총사태하고 대통령 및 군 최고지휘부 상당수는 사법치리 피할 수 없었을 것.
      특히 거짓 방송 틀어놓고 튄 대통령의 행위,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최소 휴전 후에라도 그 책임을 물었을 것.
      우린 사실 행운에 감사해야 할지도.
      우리 모두 운이 좋아 저 당시 대한민국의 20세 청년이 아니어서 개죽음 면한 것.
      북괴 공산당 매운 맛 뺨칠 정도로 자유 대한민국 정부와 군의 매운 맛도 엄청났다는 것 경험하지 못한 행운에 감사해야.
      한국전 당시 남북은 상호간
      그리고 남과 북 각각의 내부에서 머리띠 두르고 완장차고 확신에 가득차 쳐죽여댔답니다.
      그리고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 최고 지휘부의 전쟁 지휘 능력 -------------------> 전시 작전권 박탈당할 정도로 처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권 박탈당할 때 최고 지휘부에 있었던 이를 구국의 영웅인양 받드는 정신 나간 행위들이 아직도.
      또한 한국전 휴전 과정에서도 믿는 것도 없이 북진 통일 궐기하면서 나대다가, 휴전 협정 당사자로 참여도 못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대상들은 미국-유엔-중공-북괴 ------------------------------> 대한민국은 업저버 정도.
      휴전 당시 업저버 위치가 된 대한민국이라면, 대통령-정부-군의 결정적 오판 부인하기 힘들 것.
      그리 북진통일 자심감 넘쳤다면 남침당하지 말고 선제 기습 북진해서 북괴를 멸망시키는 대한민국 먼저 만들었던지 ...
      한국전쟁 직전에도 군 일부 장성들 자신감 만땅에, 전쟁 터지면 점심은 개성 저녁은 평양에서 어쩌고 주둥이질에...
      휴전 협상 과정에서도 총알 부터 식량까지 원조에 의존하면서,
      주둥이로만 북진 통일, 거기다 전시작전권 박탈당한 상태에서 주둥이로 단독으로 북진 통일하겠다고 ...
      이런 우리 과거 역사를 안다면, 기승전-정치편향 ----------------------------> 그래선 안될 겁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2 lety

      한국전쟁 휴전 후 양측 포로 송환 과정에서 벌어진 일도, 남북은 정말 극한의 찌질함-비열함 선보인.
      그냥 위대한 아메리카가 된 것이 아닐 겁니다. 아무나 활용할 거리가 넘쳐나는 것도 결코 아님을 인지해야.
      역전다방 영상 미 전쟁채권 모금 선전 활동, 미 마블 영화 주인공 방패 영웅이 나섰던. 이오지마의 펄럭이는 깃발 ...
      우린 이미 벌여놓은 일들이 개판인 상황에서 아무리 고상한 목적으로 화장한들 좌건 우건 반박은 언제나 가능하기 때문.
      반공포로 석방이 초래한 북괴측의 맞대응 명분 제공이라는 부작용도 생각해봐야.
      북괴는 우리 국군 포로 거의 대부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극히 일부만 포로 교환 때 남으로 보냈습니다.
      그 일부를 남으로 보낸 이유 역시 반공포로 거부하고 북으로 송환 원하는 북괴군 포로들을 돌려받기 위한 목적에 지나지 않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이승만의 신의 한수 논리, 북괴에게도 동일했습니다. 북괴 역시
      분단된 상태에서 언젠가 다시 적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포로 송환하기 거부하며, 강제 노동력으로 착취하겠다는 논리.
      한반도의 남북은 그렇게 잔대가리를 양측이 모두 함께 굴렸던 것.
      민족 내부 투쟁에 그렇게 열정적인 공동체는 사실 지구 전체로 본다면 미래가 결코 밝을 수 없을 겁니다.
      이승만은 신의 한수, 북괴는 야비한 작태. 또는 반대로 공화국은 마땅했고 남조선은 비열했던 포로 석방 문제라고 보기 힘든.
      포로 교환 당시 북으로 넘어가는 북괴군 포로들은,
      38선에서 팬티만 남기고 옷 다 벗어 남쪽으로 던지고 남을 향해 욕하면서 북으로 귀환.
      우리 역시 겨우 살아돌아온 국군포로들 그리운 가족과 고향 품이 아닌 북괴군 포로 수용소에 가두고,
      혹이나 간첩으로 파견된 것 아닌지 철저히 조사(아마도 폭력 동반) 중에 일부 생환 포로들이 심문 중에 사망하기도.
      팬티만 입고 북으로 넘어간 북괴군들 일부 역시 북에서 숙청되었을 겁니다. 남이 그랬는데 북이 안그랬겠습니까?
      이승만의 유명한 어록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스마트 정밀 유도 무기 판치는 오늘날 기준으로 뭉치면 함께 골로 가는 세상.
      구한말 미국 유학생에 박사에 대단히 지식이 많은 분의,
      결코 지성인 같지 않는 저런 원초적 발언과 지극히 대비되는 상놈 출신이나 다름 없던 김구의 나의 소원.
      ------------------------------------------> 한 없는 문화의 힘으로 세계 속에서 빛나는 한반도를 희망했던 그 꿈이 조금씩 현실화 되는.
      6.25 노래 유형의 한국전쟁 관련 남북의 투쟁가 -------------------> 동족 끼리 원수가 되어 부르는 투쟁가
      철천지 원수 켈트-앵글로색슨 연합체 연합왕국 UK의 외세와의 투쟁가, 룰브리타니아 ---------------------> 차원이 다른 겁니다.
      크게 크게 지구촌의 다양한 공동체 성격도 파악하면서, 민족 내부 투쟁에서의 영웅들을 재평가해보길.
      중국 국공내전 때 희생되어 현재 중국 본토와 대만의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양측 영웅들 ---------------> 제3자에겐 그저 저런.
      러시아 혁명 직후 벌어진 적백내전 때 희생된 양측의 영웅들 ------------------> 세계인들 기준에서 영웅이라고 보기 힘든.
      ------------------------------------------> 그냥 없었어도 될 안타까운 희생이 너무나 많았다고 시니컬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더 압도적일 것.
      우리 포함 세계인들이 다른 나라의 자칭 영웅들 그렇게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한반도 남북의 자칭 영웅들 역시 지구촌 사람들 입장에선 동족 끼리 왜 저랬지 하는 대상일 수도 있음도 인지해야.
      (대한민국이 석방한 반공포로, 아마도 거의 대부분은 북괴군 진주 후 강제 징집당한 남한 출신일 것.
      북괴가 포로 인정하지 않고 전사 처리했거나 아예 존재 자체를 부인한 우리 국군 포로들, 역시 대부분은 남한 출신일 것.
      이유가 뭐가 비극이었습니다.)

  • @user-wd8nq7zf1b
    @user-wd8nq7zf1b Před 4 lety +3

    기동전의 ㄱ 자도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낸 트롤짓

  • @jinyoungjung9406
    @jinyoungjung9406 Před 4 lety +9

    앞으로 패전사 이야기를 정확하게 알고 동영상 올려주세요. 먼저 자기 자신이 살기위해 부하들이 죽던지 살던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폼잡는 멍청하고 정의롭지 못한 영국군의 몽고베리 장군이 작전의 모든 책임을 폴란드 공수여단장에게 책임전과를 합니다. 폴란드 공수여단장은 강제퇴역되어 군인연금은 물론 모든 혜택과 지원을 받지 못하여 배고픔과 먹고살기위해서 열악한 회사(공장)의 현장 작업부로 평생 죽을때까지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현대시대에 와서 장난하듯이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형식적인 훈장과 공적을 만들어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모든 것들은 첫머리와 중간부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알수있는 핵심적인 부분인 마지막 결과가 가장 중요합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아른햄 마켓가든 관련 동영상 12개 첨부한 글을 올렸으니 최신순으로 검색해보길 바랍니다.
      패전한 전투에 대한 저들의 태도, 민간인 아마추어들이 과거 전투를 분석하는 방법과 노력, 국가가 참전군인을
      대하는 마땅한 자세 등을 느끼게 하는 동영상들 첨부했습니다. 그 글의 댓글에 추가로 폴란드 관련 부분도 올렸고.
      폴란드 장군에 대한 님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저 전투는 그 부분 말고도 많은 것이 있습니다.
      자유폴란드 정부와 자유폴란드군이 결국 철의 장막 붕괴 후, 폴란드 민주정부 수립 후 인정받았습니다.
      현재 폴란드 정부는 공산 폴란드가 아닌 영국에 망명했던 자유폴란드 정부와 군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아른햄에서 해 마다 열리는 기념식에 참가하는 폴란드군 관련 동영상츨 새롭게 올렸습니다.
      폴란드 노병들만이 아니라, 1944년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이 지휘했던 공수부대 또는 그 후계 부대가
      현재 폴란드 군에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그 부대 지휘관이 현역 공수부대원들을 이끌고 기념 행사에 참석.
      기념행사에선 영국 폴란드 네덜란드 3개국 국기는 국기 게양식을 실시하고, 미국 국기는 각국 군기단
      입장할 때 별도로 기수가 들고 입장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군요.
      참전 폴란드 노병만이 아니라 그 가족과 후손들도 참석해서 네덜란드 주민이나 참전 영국군들과 대화하는
      동영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역 폴란드 공수부대가 기념비 옆에서 착검한 소총으로 헌화 참배자들에게
      받들어총 군례를 표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폴란드군의 희생, 용맹과 명예는 결국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투에선 패했지만, 투입된 군인들이 버킹검궁에 초대되어 치하받고 용맹했던 일부 인원들은
      훈장 수여식과 행진을 하는 동영상도 포함됩니다. 무수히 많은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백년의
      역사에서 전쟁에는 거의 지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될 겁니다.

  • @user-fy1fr5ft8y
    @user-fy1fr5ft8y Před 4 lety +2

    사실 이전투자체가 무리수였음...몽고메리가 미국주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에 배가 아파 강행한 작전으로 보임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3

      노르망디 상륙, 미국은 얼마나 주도했는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이전 까지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역의 연합군은 영국측이 압도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이후 북서유럽에 추가 투입된 병력에서는 미국과 영국의 비율이 대략 3 :1로 미국이 압도해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 하지만 지중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북서유럽에 파견되지 않은 영국군이 육해공
      포함 100만 이상이 남아있었고.
      영국은 전후 대비를 위해 의도적으로 지중해에 많은 병력을 남겨두었죠,
      특히 종전 무렵 그리스 전토를 점령하려 시도했던 공산주의 빨치산을 토벌하고 그리스를 왕정 복고시킴.
      미국은 최대한 빨리 전쟁 끝내고 철수하겠다는 식이었지만, 영국은 좀 늦어지더라도 전후를 구상한 측면.
      그래서 노르망디 상륙 시기를 최대한 늦추고, 그 이전에 이태리와 발칸 쪽으로 신경을 많이 썼던 거이죠.
      신흥 초강대국 미국이 국제 정세 읽는 측면에서 어리숙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계획은? 3년간에 걸쳐 거의 영국 단독으로 상세한 세부 계획까지 완성했습니다.
      북서유럽 상륙 후 투입되는 병력과 물자에서 미국이 압도하기에, 연합군 총사령관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하지만 연합 지상군 사령관 영국의 몽고메리. 상륙을 실행하는 연합 해군 사령관 영국, 항공지원은 영국 미국 공동.
      노르망디 상륙 당시 미 지상군은 사실상 거의 신병 수준.
      하지만 영국도 북아프리카 전역의 베테랑인 제8군은 이태리에 묶여서 신병이 다수였습니다.
      제8군을 철수시켜 노르망디 상륙에 동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철수 순간 작전이 노출되니까.
      그래서 8군의 일부 병력을 소규모로 철수시키고, 그 병력에 다수인 신병들을 섞어서 노르망디에 투입합니다.
      노르망디에 투입된 영국 병력의 대략 2/3는 신병이었고, 1/3 정도만 지중해서 철수시킨 베태랑 정도.
      그런 이유로 노르망디에서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과 주력 기갑부대를 담당하게 됩니다.
      우선 상륙지점 배치부터 그렇습니다. 노르망디 우측에 영국과 캐나다 3군데, 좌측엔 미군 2군데가 상륙지
      영국군 상륙지는 칼레 방향입니다. 미군 상륙지는 후방의 셀부르 방향이죠. 독일은 당연히 칼레 방행이죠.
      상륙지점 부터 영국군이 독일군 주력을 담당한 것이죠.
      실제로 까앵의 거점에서 영국군은 독일 주력 기갑부대의 거의 100%를 극심한 손실을 보며 몸빵했습니다.
      미군은 상대적으로 후방 지역에서 독일의 순 알보병을 상대로 영국군과 거의 동일한 손실을 당했습니다.
      패튼의 미3군의 코브라 돌파 작전은 영국군이 독일 주력 기갑부대를 고착 소모시키는 동안의 빈틈으로 돌파.
      믿기지 않겠지만, 노르망디 전역에서 거의 알보병 상대했던 미국과 독일 기갑군 주력 상대했던 영국의
      전차 손실 총수가 대략 1200대씩 정도로 동일한 수준입니다. 참고로 독일은 1300대의 전차를 상실했죠.
      독일의 손실은 후퇴 과정에서 유기 자폭된 것도 많습니다. 순수 전차 대 전차 손실은 미영이 압도당했죠.
      .
      거의 생초짜 미 신병들은 독일 알보병 상대하면서도 엄청난 전차 손실을 당했습니다. 영국군이 지지부진
      하고 미군은 코브라로 전격전을 펼쳤다? 엄밀히 말하면 말이 안되는 주장입니다. 전역 막바지 독일 기갑군이
      무력화되고, 극심한 폭격으로 너덜너덜해진 알보병 주축의 독일군 방어지역을 최후의 순간 그냥 휩쓸고 지나간
      행운도 패튼에게 주어진 측면이 있죠. 패튼이 까앵에서 독일 주력 기갑군을 상대했다면? 알 길이 없죠.
      셔먼 가지고 타이거 상대? 초짜 미 신병 전차병들로 독일군 상대? 패튼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잘한다는 보장?
      사실 패튼은 전성기의 독일군과 교전해본 적이 없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에서 별로 교전한 적이 없죠.
      그러나 몽고메리는 덩케르크 철수전과 엘알라메인, 시칠리 모두에서 독일군과 교전했었습니다.
      이 모든 세부 작전 계획은 상륙 이전에 다 짜여진 겁니다. 영국이 독 주력 고착 소모할 때, 미군이 돌파.
      문제는 영국군과 미군 모두 거의 신병들이고, 독일 기갑부대의 장비가 연합군 보다 월등해 예정된 시간 보다 3주 정도 늦게 까앵을 점령했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몽고메리가 욕을 많이 먹고 무능하다고 손가락질 당했죠. 하지만 그당시 신병들로, 독일의 타이거 전차등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예정 보다 늦어졌지만, 결국 독일군은 팔레즈 포켓 함정에 걸려 거의 괴멸적 타격을 입게 되죠.
      에니그마 암호 해독으로 영국은 독일의 모르탱 역습 길목에 영국 기갑부대를 매복시키고, 제2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팔레즈 포켓에서 독일 기갑부대를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늦어졌지만 결국 작전 계획대로 승리했습니다.
      이 정도에서 다시 질문을 한다면 과연 어떤 답변이 좋을까요?
      노르망디는 미국이 주도했는가?
      작전 수립은 거의 영국 단독, 노르망디에서 독일 주력은 거의 영국이 고착 소진시킴. 이 노력은 그냥 들러리일까요?
      상륙에 동원된 해군력 거의 영국, 상륙지에 건설된 2개의 인공항구 멀버리와 해저 송유관 건설등도 영국.
      노르망디 상륙 이후 북서유럽에 투입된 총병력에서 영국 100만, 미국 300만 측면에서 미국이 다 한 것일까요?

    • @flexbonham6801
      @flexbonham6801 Před 4 lety +2

      @@scz8333 장황하게 썼지만 영국입장의 볼맨 소리일뿐 아 군대야 초짜였을지 모르겠지만 모조리 다 미국의 보급, 미국의 자금, 미국의 지원으로 이뤄진게 노르망디지.. 영국이 그리 엄청난 주도를 했다면 미국이 왜 참전하겠나...영국은 자기나라 하나 지키기 벅찬 상태였지.. 덧붙여 몽고메리는 자기 부하 죽이는게 취미인 맛간 영감임...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flexbonham6801
      읽는 사람 기분 참 그렇게 만드는 댓글이군요.
      미국의 물량과 병력이 노르망디 상륙 후 영국의 3배라는 것 밝혔습니다.
      엄청난 미국의 물량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참전 이후 유럽전선의 전반적 작전계획은 미국이 주도 못했죠.
      진주만 이후 미국이 참전했지만, 미국은 뺨 맞은 태평양 아닌
      대독일 우선 정책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왜일까요? 영국측이 그 쪽으로 유도했기 때문.
      미국은 북서유럽 상륙을 빨리해서 전쟁 마치려 했지만, 이태리 침공이 먼저 시작되었죠. 왜? 역시 영국이 유도.
      이태리의 상륙지도 미국은 서부, 영국은 발칸과 아드리해 쪽의 동부였습니다.
      영국은 사실 프랑스에 상륙 급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어짜피 승리하면 자동 해방되는 곳이라.
      프랑스에 뭐 소련군이 들어올 수도 없고.
      미국이 관철시킨 상륙작전은 프랑스 남부에 상륙한 앤빌 상륙 작전입니다. 불필요한 것이죠.
      프랑스 남부에 왜 상륙합니까? 노르망디에서 승리하면 어짜피 퇴각으로 몰려 항복할 운명인데.
      그래서 영국군은 프랑스 남부 상륙에 불참합니다.
      영국은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대서양 연안의 전술적으로 무력화된 독일 기지 요새들 점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통과.
      심지어는 프랑스 연안 근처의 영국령 저지 군도에도 상륙하지 않고 종전 후에 독일군 무장 해제시킵니다.
      영국은 전쟁이 더 길어지더라도,
      지중해 발칸과 남부유럽에서 대륙을 침공해 동구권 지역에 최대한 진출하려 했던 같 같군요.
      미국 영국의 2차대전 대전략은 영국의 구상에 미국이 동의하고 끌려간 측면이 아주 강합니다.
      님이 가능하다면 카사블랑카 회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은 철저하게 영국측에 당했습니다.
      엄청난 물주였지만 아직 철부지 소년 같았던 최강대국 미국이 노련한 영국에 전략에서 압도당해 동의한 결과.
      카사블랑카 당시, 영국은 통신 전용의 함정이 별도로 있을 정도로 완벽한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미국은 그런 영국에게 별 준비 없이 하루 빨리 프랑스 상륙해서 전쟁 조기 종결 주장하다,
      미영 양국 지도자와 참모들 모인 합동 토론에서 완벽하게 제압당해
      영국측 전쟁 설계를 수용했습니다.
      회담 후, 미 대표단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당했노라!
      물량과 자금만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량과 자금을 투입할 곳을 지정하는 단계는 더 원초적인 단계죠.
      노르망디 상륙,
      노르망디 작전 계획을 실제로 짠 장군이 누군지 확인해보시죠.
      노르망디 전역에서 독일군 주력 기갑부대를 미군이 맡았는지 영국군이 맡았는지 확인해보시죠.
      노르망디 전역에서 사실상 거의 알보병 상대한 미군의 전차 손실이 영국군과 동일하다는 것 확인해보시죠.
      신병이었던 미군의 전투력이 이제 막 배워나가는 단계였다는 것이겠죠. 물론 3개월만 버티면 베테랑이 되죠.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 투입 당시에는 미군은 사실상 완전 신병이라, 독일군 주력을 담당시킬 수 없었습니다.
      미국과 아이젠하워도 그것을 인정하고 상륙 지점과 병력 배치를 동의해 상륙전에 임했겠죠.
      노르망디에서 패튼의 코브라 돌파는,
      2차대전 초 독일군의 전격전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돌파라고 같은 돌파가 아니죠.
      독일군의 2차대전 초 전격전 돌파는 전쟁사에 충격 그 자체였으나, 패튼의 돌파는 미국 입장에서 대성공 수준.
      2차대전 초엔 상대적으로 장난감 수준의 전차로도 전격전이 성공했지만,
      2차대전 후반기에는 아무리 중무장한 기갑부대라도 견고한 적 방어선에 대한 전격전은 불가능했습니다.
      2차대전 전사, 특히 노르망디 전역에 대해
      상식 수준을 넘기 위해선 조금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님은 글 내용 이전에 글을 쓰는 태도 부터 되돌아보길.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초특가야놀자
      님같은 사람은 유튜브 동영상도 3초 요약본 보면 됩니다.

    • @JJJ00-12
      @JJJ00-12 Před 4 lety +1

      sc z 2차세계대전때 영국군이 상당히 저평가된 국가인건 인정하지만 영국군 자체의 조급증 (특히 굿우즈 작전, 빌레즈 포위작전 등) 때문에 전쟁내내 발목잡은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당시 영국군 교리가 대전략교리 였기때문에 연합군입장에서는 엄청 답답했죠 물론 손실+교환비는 어느정도 보장되지만 더딘 진격속도로 어느정도 비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독일군과 영국군 전차 교환비를
      언급하셨는데 당시 대다수의 독일군 전차들은 연합군 제공권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보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연료부족으로 후퇴시 비전투파괴 비율이 높았습니다. 영국군이 잘 싸운게 아니고요... (물론 영국군이 잘 버틴건 사실이지만 당시 워낙 전세가 기울었기 때문에)
      그리고 영국군과 미국군 비율이 틀립니다.
      6/25 당시 기준으로 미국군은 정확히 812000명, 영국군+캐나다군은 640000명입니다
      다른 오류는 전부 다 영국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이것도 오류입니다
      1943년 5월 당시 미국은 유럽에서의 상륙을 고안했고 영국군 사령관들을 워싱턴으로 초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초안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마지막으로 영국군이 독일 정예 기갑사단을 상대했다? 이것도 오류입니다 마켓가든작전 당시에 영국군 공수부대가 상대한 대다수 기갑사단들은 오합지졸 부대입니다 (패잔병+신병+보급부족) 또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군이 상대했던 독일군 사단들 중 몇몇 사단은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특히 오마허 독일군352사단, 카랑탕 전투는 제2 팔슈름예거 사단(최정예), 17ss기갑사단 등)

  • @user-yk5xb1ku7l
    @user-yk5xb1ku7l Před 2 lety +5

    제 2차 세계대전
    미국 아이젠하워.
    영국 몽고메리.
    독일 롬멜.
    이것도 현지 레지스탕스 말을 개무시한 댓가.
    미국은 화력은 좋은데
    현지 사람들을 무시해서 개박살 남.
    참고로 베트남전이 있지.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아른헴 전투와 페가수스1 : 드론 촬영 공중에서 지상 내려다 본 영상 (해외 군사매니아 동영상 4편)
    1. Then & Now | Oosterbeek Perimeter (South) | September 1944 (포위된 영국 공수부대 거점 방어지역 전투)
    czcams.com/video/mAFv80fyMNQ/video.html
    아른헴 기념비 있는 장소가 바로 Oosterbeek 입니다. 영국 공수부대가 주로 전투를 벌였던 지역.
    2. Then & Now | Westerbouwing | 21-24 September 1944 : 폴란드 공수부대 투입되어 영국군과 함께 전투
    czcams.com/video/QpjiPKXNeH8/video.html
    3. Then & Now | Operation Pegasus 1 | 22-23 October 1944 : 아른헴 실패 후, 고립된 병력 일부 강 건너 탈출
    czcams.com/video/OfDg5km6OwU/video.html
    아른헴 이후 서부 연합군은 재정비에 들어가고, 종전을 위한 대규모 공세는 겨울이 지난 45년초로 변경됩니다.
    독일은 연합국의 공세 가능성을 막기 위해, 댐들을 폭파시켜 북서유럽 저지대 대부분이 늦가을 초겨울 늪지대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벌지에서 공세를 취하지만 실패하죠. 벌지전투에서 독일이 연합국 방어선을 붕괴
    시키고 역전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노르망디 전선에서 독일군이 붕괴된 이후 병력, 연료, 탄약 등 모든 면에서
    전쟁의 향방을 바꿀 여지 전혀 없었습니다.
    4. Then & Now | Groesbeek & Nijmegen : 미군 캐나다군 전투 지역 공중에서 바라본 영상.
    czcams.com/video/IEGj_kAuvpM/video.html
    영국 미국 유럽의 군사매니아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위 동영상 자료들로 느끼게 됩니다..
    저들은 우리와 달리 수 많은 자료들을 만들었고,남겼고, 접근이 더 쉽습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하죠.
    승리한 전투도 아닌데 저렇게 분석하는 집단이 속한 공동체가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것 우연이 아닐 겁니다.
    이 글 직전 올렸던 아른햄 기념식 관련 영상들 보면, 저들이 참전 군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군이 얼마나
    명예로운 집단인지 알 수 있죠. 명예를 잃을만한 일도 벌이지 않는 군임은 물론 당연한 것이고.

  • @scz8333
    @scz8333 Před 3 lety +1

    엘알라메인, 몽고메리만이 아니라 롬멜도 정면돌파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동영상 첨부, 40초 이후 보시죠.
    카타라 저지대, 사막지역인데 늪, 진창과 같이 걷기도 힘들고 기갑부대가 통과할 수 없는 지역이 있습니다.
    지중해의 바닷물이 지하로 연결되었는지 사막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지형적 장애물로 인해 우회 포위 섬멸이 불가능.
    czcams.com/video/L-rRc5hQFbA/video.html
    엘알라메인, 바로 이런 지형적 제약 때문에,
    토부룩 함락 후 잽싸게 이집트로 진격하던 롬멜이 여기서 멈추게 됩니다.
    알엘라메인의 영국군 방어선은 지중해 해안으로부터 남으로 카타라 저지대까지 이어집니다.
    카타라 저지대 남쪽으로는 모래 천국 사하라 사막이 펼쳐져, 지중해 해안선에서 카타라 저지대 사이 좁은 폭만 기동 가능.
    토부룩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하던 영국군이 최후의 방어선을 엘알라메인에 설치한 이유가 카타라 저지대 때문.
    저런 지형이 아니었다면 롬멜은 그냥 간단히 영국군 방어선 남단을 우회 해서 돌파했을 겁니다.
    방어에선 최적지였지만, 공세를 취할 때는 최악의 조건이 되고 말죠.
    저 방어선 선택은 해임된 오킨렉 장군이 했습니다.오킨렉이 해임된 이유는 토부룩 상실이 결정적이라 추측됩니다.
    몽고메리가 아닌 오킨렉이 계속 지휘했어도 영국군은 독일군을 북아프리카에서 축출시켰습니다.
    저 시점에서는 독일군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후임으로 부임한 몽고메리는 지형적으로 기갑부대의 정면돌파,
    그것도 적 방어선 정면에 최악의 축차 투입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충분한 수량의 전차와 물량이 비축될 때 까지 공세를 최대한 늦추죠. 처칠의 이른 공격 요구를 거듭 거부하면서.
    몽고메리가 전술적으로 후달려서, 물량빨로 겨우,
    그것도 큰 인명 피해내면서 이긴 졸장? 어림도 없는 매도입니다. 저 지형에선 그 어떤 다른 대안도 없습니다.
    영국군은 그렇게 물자 비축하면서 대기하며
    롬멜이 최대한 우회기동 해서 공세를 취할 카타라 저지대 경계선 근처에
    대전차 함정을 파고 기다렸고. 롬멜은 할람함파 에서 대전차전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돈좌됩니다.
    그 이후 롬멜은 일방적 수세로 몰리죠.
    이런 지형적 제약은 몽고메리가 공세로 전환할 때도 동일했습니다.
    즉 영국군이 독일군 방어선을 우회 돌파 포위 불가능해서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지대를
    보병 투입해서 손으로 지뢰 하나 하나 제거하고, 그렇게 확보된 통로를 독일군이 뻔히 보는 가운데 탱크들 투입.
    투입된 탱크들 마구 퍼져나가도 어쩔 수 없이 독일군 방어선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투입해서 결국 돌파. 어쩔 수 없었던 것.
    실제 전투에서 영국군은 해안선 쪽 도로의
    아주 좁은 곳으로 우회 아닌 우회 기동을 하면서 독일군 방어세력을 일부 이동시키면서 전선 돌파.
    롬멜은 현명하고, 몽고메리는 어리석어 엘알라메인 영국의 공세에서 큰 희생이 발생했다? 어림 택도 없습니다.
    롬멜도 몽고메리도, 어느 누구도 엘알라메인 전선 돌파는 피 흘리는 정면돌파 외엔 대안이 없었습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미드 전쟁 드라마, 밴드오브브러더스 : 어원은 셰익스피어작 헨리5세 중 국왕의 연설
    검색해보면 미드 밴드오브브러더스에서도 마켓가든 전투 참여 다루고 있더군요. 어원을 소개합니다.
    중세 백년전쟁 중 벌어진 아쟁꾸르 전투가 그 기원입니다. 병력은 적었지만, 저들은 강했었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
    셰익스피어 헨리5세,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
    czcams.com/video/cRj01LShXN8/video.html
    "This story shall the good man teach his son;
    And Crispin Crispian shall ne'er go by,
    From this day to the ending of the world, But we in it shall be remembered-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For he to-day that sheds his blood with me
    Shall be my brotherbe he ne'er so vile,
    This day shall gentle his condition;
    And gentlemen in England now-a-bed
    Shall think themselves accurs'd they were not here,
    And hold their manhoods cheap whiles any speaks
    That fought with us upon Saint Crispin's day."
    "오늘의 이야기는 (참전한 너희들이) 자식에게 두고두고 전할 것이고,
    성 크리스핀의 날은(아쟁꾸르 전투 일) 결코 잊혀지지 않고,
    오늘부터 세상 끝날까지 우리는 이날마다 기억될 것이다-
    우리 비록 수는 적으나, 그렇기에 행복한 우리,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다.
    오늘 이 전투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리는 자는
    내 형제가 될지니, 그 신분이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오늘부로 그 신분은 귀족이 될 것이고,
    지금 잉글랜드에 남아 편히 침대에 든 귀족들은
    여기 있지 못한 것을 저주할 것이고
    우리와 성 크리스핀의 날에 함께 싸운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자신의 용기를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유명한 미국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은 셰익스피어 원작 헨리5세에 나오는 국왕의 연설이죠.
    미국이 많이 베끼는 편이죠.
    형제들의 모임, 집단이라는 의미로
    백년전쟁 당시 아쟁쿠르 전투 직전, 병력 열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영국 병사들에게 헨리5세가 했던 연설이라고 합니다.
    빈 말이라도 저렇게 하는 국왕, 국가, 군이라면 목숨을 바칠만 하겠죠.
    백년전쟁 시기 헨리5세 연설, 사실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창조된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부럽긴 하네요.
    영국엔 불행, 프랑스엔 천만다행으로 헨리5세는 저 전투 승리 얼마 후 젊은 나이에 병사합니다.
    저 전투로 부터 약 20년 후, 쟌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는 백년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고.
    백년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인구비는 대략 1:5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영국 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인구비는 그래도 1:3
    2차대전 당시 주요 교전국 중 영국 본토 인구는 가장 적었습니다. 4500만 정도.
    2차대전 당시 소련 1억5천만 이상, 미국 1억 훨씬 넘고, 독일도 1차대전 때 이미 6500만.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최초의 제트기 항모 이착륙:1945년 12월3일, 놀라운 2차대전 전시 기술발전 속도
    czcams.com/video/PNoUBil7A3c/video.html
    2차대전 종전된지 불과 몇 개월 후인, 1945년 12월3일 경사장갑갑판의
    영항모 오션에서 세계 최초의 제트 함재기 이착륙이 일어났습니다. 착륙 후 이륙 순으로 성공했습니다.
    에릭 윙클 브라운 이라는 테스트 파일럿은 487종의 연합국과 추축국 비행기를 시험 비행한 깨지지 않을 세계 최다 기종 테스트 비행사입니다. 영국해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 테스트 파일럿으로 전향했습니다. 최다 기종, 최다 항모 이착륙 기록, 기타 수 많은 기록이 아직까지 깨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특히 최다 기종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겁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신기종이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또한 에릭은 1944년 영공군의 모스키토 폭격기를 항모에 최초로 착함시켰고, 종전 직후 독일의 제트기와 로켓 항공기등 추축국 항공기들을 시험비행했습니다. 소련의 인류 최초 우주인 유리 가가린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글라이더, 복엽기, 전투기, 폭격기, 민항기, 헬기, 수직이착륙기 등 거의 모든 기종을 포함한 487종.)
    제트기를 항모 갑판 거의 끝에서 착륙시켜 아주 짧은 거리에서 멈춘 놀라운 착함 모습입니다.
    전쟁이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영국과 미국은 제트 함재기로 태평양 하늘을 휩쓸었을 겁니다.
    미국 일본 항모와 달리, 지중해와 북해라는 육지로부터 가까워 적 공군력에 노출되기 쉬운 조건이라 영국 항모는 장갑갑판을 먼저 도입하게 되었고, 지중해에서 여러 직격탄에서도 단 1척도 격침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정도엔 벌써 경사갑판으로 개조된 영국 장갑항모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미국도 이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장갑갑판, 경사갑판, 광학식 착륙유도장치, 증기 캐터펄터 등 항모에 필수적인 거의 모든 요소들이 영국 해군에서 도입되어 미국으로 이전되었습니다. 미국이 도입하지는 않았지만 항모의 스키점프대 역시 마찬가지죠.
    유명한 고성능 미 함재기 코르세어의 항모 사용도 미해군이 아닌 영해군이 먼저 도입했습니다. 전방동체가 크고 길어서 항모 착함시에 시야를 막아 미 해군은 해병항공대의 육상기지 사용으로 돌리고 항모 도입을 하지 않았지만 영국 해군에서 새로운 착륙방법을 도입해서 최초로 항모에 탑재했고 미항모에 그 착함 방식이 이전되었습니다. 직선 경로로 착함하지 않고, 선회하면서 착함하는 방식으로 시야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curved approch : 영 해군이 개발한 corsair 착륙법, corsair 전방 시야가 좋지 않아 항모 접근시 관측하기 용이하도록
    (항모 주변을 곡선을 그리며 선회하면서 접근하며 측면에서 갑판을 보며 고도를 맞추어 착륙) 7분35초 이후 보시길
    czcams.com/video/rNcV13uayxw/video.html
    위키백과 인용
    (1943년 11월 영국 해군은 보우트사가 납품한 95 기의 F4U-1 커세어를 커세어 MK I 으로 분류하여 배치하였다.[62] 첫 비행중대는 미국 동부 연안에서 결성되어 훈련을 받은 뒤 대서양을 건넜다. 영국 해군은 커세어를 항공모함에 탑재하고 즉시 작전에 투입하였다. 작전이 실행되자 다수의 커세어의 착륙 특성 문제가 드러났고, 다수의 커세어가 이 과정에서 파손되었지만 영국 해군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영국 해군에 납품되는 커세어는 영국의 항공모함의 격납고 크기에 맞추기 위해 윙팁이 8 인치(200 mm)정도 짧았다.[63] 주익의 폭을 줄인데다 갑판의 활주로도 짧은 영국의 항공모함에서 운용된 커세어는 미국의 경우 보다 오히려 착륙 사고가 적었는데, 영국 해군의 조종사들은 착륙시 갑판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현 방향으로 돌아서 접근하면서 하반각을 이루는 날개뿌리 너머로 활주로를 확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방법은 미국 해군의 함상 커세어 운용에도 전파되었다.[64]
    영국 해군은 F4U-1A 커세어를 차례로 도입하여 510 기를 추가로 배치하고 커세어 MK II로 호칭하였다. 커세어 MK II중 마지막 150기는 F4U-1D였으나 별도의 구분 없이 모두 MK II로 분류되었다.[65] 이후 도입된 F3A-1 커세어 334 기와 F3A-1D 96기는 커세어 MK III[66] 400 기의 FG-1/1A와 457 기의 FG-1D는 커세어 MK IV로 호칭되었다.[67] 실제 전투에 투입된 기종은 MK II와 MK IV 뿐이었다.[68] 몇 가지 개량을 거친 뒤 영국 해군은 아무런 문제 없이 커세어를 함상 전투기로 운용하였다. 심지어는 갑판이 작은 호위 항공모함에서도 이착륙에 문제가 없었다. 영국은 총 2,012 기의 커세어를 공급받았다.[46]
    영국의 첫 함대 항공단은 미국 퀀셋 포인트 항공 기지에서 결성된 1830 비행 중대로 HMA 일러스리어스에 배속되었다.[69] 1945년 7월에서 8월사이 영국의 함대 항공단 소속 1834, 1836, 1841, 1842 비행 중대는 일본 본토 공격에 참가하였다.[70] )
    유투브 게시물 댓글 인용
    (Altered Beast
    2년 전
    The F4U was notoriously difficult to land on a carrier because of the huge elongated nose and massive Pratt & Whitney R2800 engine. Being a tail dragger the attitude of the aircraft on the ground was almost impossible to achieve accurate forward visibility. As with many big radial engine fighters of the period such deck take offs and landings were very risky and resulted in considerable losses. So much so that the US marines who flew Corsairs operated them from ground based airstrips. It wasnt until the British who effectively solved this problem but implementing the curved approach for deck landings that led to US navy pilots adopting the same method. Like many other examples of great ingenuity the British learned to adapt and overcome. It should also be noted that British aircraft test pilot Eric "winkleman" Brown was responsible for many feats of aerial genius. Even making several successful carrier landings in the TR-33 Sea Mosquito. As well as later going on to become the first pilot to successfully land a jet aircraft on the deck of a carrier. He was a true aviation legend, sadly missed..... )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윈스턴 처칠, 2차대전 방송 연설 모음. (전선 방문시 연설 제외한) 가장 중요한 연설들.
    1. BLOOD, TOIL, TEARS AND SWEAT speech Winston Churchill : 피, 수고 눈물과 땀 (1940.5.13)
    czcams.com/video/80_HXIHa724/video.html 자막 없음
    czcams.com/video/fKBR0igDPfM/video.html 영어 자막
    2. WE SHALL NEVER SURRENDER speech by Winston Churchill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덩케르크 (1940.6.4)
    czcams.com/video/s_LncVnecLA/video.html
    3. THEIR FINEST HOUR speech by Winston Churchill 영국 홀로 항전 (1940.6.18)
    czcams.com/video/6jjhxeHIjvU/video.html
    4. 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was so much owed by so many for so few 영국항공전 치하 (1940.8.20)
    czcams.com/video/oiISJ1Z40Y4/video.html
    5. GERMANY SURRENDERS announcement by Winston Churchill 독일 항복 발표 (1945.5.8)
    czcams.com/video/JNTWyqVCBZc/video.html
    6.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 VIDEO RECORDING from The Sinews of Peace speech 철의 장막 (1946.3.5)
    czcams.com/video/lULSK10LQqA/video.html
    웬만한 국가 지도자, 장군들 어록과 비교할 수 없는 연설들이죠.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 케네디 취임 연설 등과 함께 극적인 연설입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전시 연설중에선 언론-신앙-결핍-공포 로부터의 4가지 자유 연설도 그렇고.
    밴드 오브 브러더스 : We few, we happy few, we band of brothers.
    (우리 수는 적지만, 그래서 행복한 우리, 우리는 한 형제)
    정치인 아닌 작가 셰익스피어의 헨리5세 대사와 같은 극단적 축약은 아니지만 집약된.
    대한민국에서 연설은 아니지만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은 대단한 혜안과 소망을 담고 있죠.
    학력은 훨씬 더 좋은 (미국 박사 출신) 이승만의 어록 중에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외엔 기억 안남.
    (오늘날은 스마트 폭탄으로 뭉치면 떼죽음 당하는데, 과거에도 운이 없으면 그렇게 되고)
    가장 비참한 전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웰링턴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가장 비참한 전쟁은 패배한 전쟁, 그 다음 비참한 전쟁은 승리한 전쟁
    웰링턴의 저 한 마디로 전쟁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승리, 영광 그런 것 다 허깨비 같은 겁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3

    영국 마지막 랜드리스 상환금 완납 : 2006년 12월29일, 연이율 2%로 50년 분할 (종전 후 추가 대출 시점 부터 50년)
    영국이 미국에서 지원한 막대한 물량빨에 병력빨 까지 보태여 겨우 이겼다는 분들 읽어보길.
    영국은 지원받은 그 물량 공짜로 꿀꺽 삼킨 적 없습니다. 종전 후 61년 만에 랜드리스를 다 갚았습니다.
    1. 전쟁 발발 직후, 긴급 상황에서 해군 구축함이 부족해 미국에서 구축함 임대
    미국이 보관 중이던 구식 1차대전형 낡은 구축함 50척을 임대하는 조건으로 카리브해,
    대서양, 인도양의 영국령 해외 기지들을 미국에 99년간 사용 허가내주었습니다. 인도양의 디에고가르샤 포함.
    세월이 지나고 보니, 미국이 엄청난 이익이죠. 쓰지도 않고 보관중이던 1차대전 구축함 임대해준 대가.
    2. 레이더, 제트엔진, 마그네트론, 초기 핵무기 개발 자료, 페니실린 등 미국에 넘김.
    2차대전 중 미군이 사용한 레이더는 사실 영국이 제공한 기술로 만들어진 겁니다.
    특히 레이더의 핵심 부품인 신형 마그네트론은 기존 미국제 보다 성능 효율이 비약적으로 1,000배 정도 고성능.
    독일은 추락한 영 공군기에서 마그네트론을 입수하긴 했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무시해 몰랐고.
    영국이 제공한 고성능 마그네트론이 대량 생산되어 미국 영국의 레이더에 공급되었습니다.
    핵 무기 개발도 영국이 튜브 앨로이 계획을 본토에서 실행중
    폭격으로 캐나다로 옮겼고, 미국과 협상해서 맨허턴 계획에 영국, 캐나다 합류.
    미국 보다 영국이 먼저 핵 개발에 나섰고, 핵 폭발의 최초 임계량도 영국이 먼저 계산해 미국에 넘겼습니다.
    제트엔진 역시 마찬가지죠. 독일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독일은 축류식, 영국은 구식 원심식 제트엔진도 오해입니다. 애초 프랭크 휘틀의 제트엔진 특허가 축류식.
    하지만 당시 기술로 고열 고압을 버티는 금속 재료가 없어 그 우회 수단으로 원심식 제트엔진을 도입한 것.
    당시 독일 제트 엔진의 수명은 수십 시간이지만, 당시 사용후 보존된 영국 제트기 지금도 비행 할 수 있습니다.
    미국으로 넘어간 페니실린이 미국에서 대량 생산되어 수 많은 군인들을 살렸습니다.
    미국이 이 건은 확실히 한 몫 단단히 챙겼습니다. 평시에 어느 나라가 저런 핵심 기술을 타국에 제공합니까?
    3. 랜드리스 상환 과정.
    미국은 당시 가격으로 약 320억 달러의 물품을 영국에 전쟁 중 제공.(현재 가치로는 5천억 달러 훨씬 넘는)
    전쟁으로 파산한 영국은 갚을 능력이 안되었고, 미국은 90% 떨이로 10% 정도로 상환 받기를 원했지만, 그 마저 어렵자
    종전 후 이자 포함 약 37억불을 영국에 대출해주고 대신 2% 연이율로 50년간 분할 받기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미국도 참 끈질겼죠. 2차대전으로 완전 횡재하고 세계 최강국 되었으면
    그냥 털고 넘어갈만도 한데, 추가 대출까지 해주면서 50년 넘도록 상환금 받아냈습니다.
    소련에게는 갚으라는 요청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가장 가까운 동맹에게는 철저하게 정산 요구.
    2차대전 전시 물자 생산 대호황으로 전쟁 전 대공황 후유증에서 완전 벗어났죠. 미국에겐 랜드리스도 투자.
    중간 중간 상환금 납부가 일시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결국 2006년 12월29일
    마지막 금액 8330만불 최종 상환 했습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영국이 갚은 상환금은 총 570억 달러.
    물론 소련은 그냥 꿀꺽 삼키고 하나도 안갚았습니다.
    유일하게 뉴질랜드는 미국에서 받은 것 보다 더 많이 그것도 종전 얼마 후에 다 갚았다고 하는군요.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에게 제공받은 군수 물자 보다, 뉴질랜드가 미국에 제공한 식량과 원자재가 더 컸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영국은 2차대전에 거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공짜로 랜드리스 받아 먹고 풍부해진 물량빨로 물자 낭비 펑펑하면서 무식하게 싸워 겨우 이긴 것이 아니죠.
    미국은 영국에 랜드리스 물자 제공하는 댓가로 챙길 것 엄청나게 많이 챙겼습니다.
    영국이 미국에 제공한 기술들은 당시 기준으로는 최상급, 독일도 뒤쳐진 부분이 있는 최상급 기술이었습니다.
    핵무기 개발에는 너무나 많은 비용과 자원이 들기 때문에 영국 단독으로 끝 까지 하지 못하고 핵심 정보를 미국에 넘겼죠.
    핵무기 개발 맨허턴 계획이 시작된 계기로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아인쉬타인의 편지 보다 훨씬 결정적인, 핵폭발을 일으키는 임계 핵물질 질량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핵 폭탄이 실제 제조 가능하다는 정보가 미국에 넘어가지 않았으면 미국도 핵 개발에 쉽게 나서지 못했을 겁니다.
    미국 역시 영국에게서 받은 기술지원을 금액으로 환산해 제하고 상환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볼 때, 미국이 받은 기술 지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당시 까지 영국, 독일에 과학 기술 뒤쳐졌던 미국이 이후 가장 선두가 되는 계기.
    종전 후 독일 기술 까지 입수하면서 과학 기술에서 유럽을 앞서게 된 출발점으로서 매우 결정적.
    영국이 삽질한 개별 전투 사례만 들면서,
    그런 국가, 군대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은 심할 수도 있죠.
    물량빨, 병력빨로 무식하게 싸우면서 겨우 이겼다라는 주장은 상당히 지나친 겁니다.
    영국은 오히려 2차대전에서 물량과 병력이 너무 부족해 전쟁에서 고전하고 겨우 이기고 파산한 겁니다.
    영국의 역사와 전쟁 경험을 볼 때, 그들이 물량과 병력이 충분하다면 고전이고 뭐고 겪을 국가와 군이 결코 아니죠.
    당시 주요 교전국 중 영국은 인구가 가장 적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병력 부족에 시달렸죠.
    당시 영국 4000만, 소련 1억5천 이상, 미국 1억, 독일은 1차대전 때 이미 6500만.
    전쟁 발발 직전 보유한 정규 지상군 영국과 미국은 20~30만 수준이었을 겁니다. 독일과 소련은 수 백만.
    그 상태에서 전쟁 개시와 함께 병력 대규모로
    확장되었지만, 영국은 인구 한계로 상시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렸죠.
    미국은 물론 인구 잠재력이 커서 2차대전 연병력이 1000만 까지 확장되었지만.
    영국과 미국이 구 프로이센, 1차대전 직전 독일, 재군비로 확장된 독일, 소련과 같은 병영국가 군국주의였다면
    평시에 이미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을 보유했을테고, 그럴 경우엔 2차대전 독일의 전격전 신화 쉽지 않았을 겁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2019 마켓가든 75주년, 아른헴 : 3번 동영상은 1954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영국 숀커네리역 장군 참석.
    czcams.com/video/NC3hW508SmI/video.html
    2. 1949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전투 5년후 실제 작전 수행했던 베테랑들 참석.
    czcams.com/video/WHaqLCmza9U/video.html
    3. 1954 마켓가든 기념식 아른헴, 작전 지휘했던 폴란드와 영국 공수부대 장군 참석
    제목 : The "Many" Honour The "Few" - Nijmegen And Arnham (1954)
    czcams.com/video/oNYQ0s5VFxo/video.html
    영국 제1공수사단장 Roy Urquhart(숀커너리 역), 폴란드 소사보프스키 장군
    4.1944 마켓가든, 실제 전투 기록 영상
    czcams.com/video/3WWE8ZMfLSs/video.html
    5.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4k
    czcams.com/video/gt3hmNx0hbw/video.html
    6. 2019 마켓가든 75주년 공수강하
    czcams.com/video/2rVRXUmNE30/video.html
    7. 마켓가든 그 때와 지금 : 44년 전투 당시 사진과 그 위치의 현재 사진 비교
    czcams.com/video/f2M-onQwmaU/video.html
    8. 2019 마켓가든 75주년 기념 공수작전 낙하부대원들 기내 및 착륙. 기념식 포함
    czcams.com/video/qMr7oRB7UsY/video.html
    9.1955 마켓가든 전사자의 아이들 75명, 아빠 잠든 아른헴 전사자 묘역 방문.
    czcams.com/video/AmeEV_xTF4w/video.html
    10.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에서 출발, 영국 백파이프 행진 2019년
    czcams.com/video/xIf-zJ_E0Us/video.html
    2019 백파이프 연주하면서 존 프로스트 중령 이름 딴 다리 출발 시내 행진하는 모습.
    패배한 전투라고 덮고 넘어가지 않고, 그 패배 속에서 더 빛나는 영웅들을 추모하는 것.
    저 백파이프 연주자 중에는 75년 전 노병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 하얀 노인들도 섞여 있습니다.
    찾게 되면 나중에 추가할 예정인데 폴란드군 역시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별도의 기념비도 있고.
    폴란드군만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영국 공수부대도 폴란드군 기념식에 함께 참여해서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실제 전투로 부터 가장 최근인 1945년 기념 영상도 찾게 되면 첨부하겠습니다. 전에 어디서 보긴 본 것 같은데.
    11. 30군단 아이리시 가드, 좁은 도로 전진 중 독일군 매복에 걸린 전투 분석 : 과거 전투 영상, 기록과 현재 지형 비교.
    czcams.com/video/T7UCLf7a-3k/video.html
    매복 공격당해 격파당한 영국군 기갑 차량들 사진, 그 차량에서 숨진 전사자 이름 까지 나오는 분석
    과거 전투 기록 그것도 동영상 포함 많고, 수십년이 지나도 분석하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것 부럽죠.
    정부와 군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의 아마추어들이 이렇게 활동합니다.
    세계를 좌지우지 해봤거나 하고 있는 세력 공동체는 전쟁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그럴지도.
    12. 2014 아른햄 존 프로스트 다리를 방문해 헌화하는 노병들, 전투 70주년 기념식
    czcams.com/video/OBH9AA4OTAw/video.html
    9번 동영상은 아른헴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들의 아이들이 아빠 묘소를 찾는 영상입니다.
    영국 정부가 제공한 항공기로 네덜란드 방문해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
    전투에는 패해도 전쟁에는 지지않는 역사가 왜 일어났는지 위 동영상들을 보면 느낄겁니다.
    패배한 전투를 그냥 넘기지 않고 기억하는 자들만이 전쟁에서 승리할 자격이 있는 것이죠.
    마켓가든 교전국 피해 (현지 레지스탕스 피해 자료 못 구함)
    독일 : 전사 약 2,000명, 부상 약 8,000명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포로 확인 못함)
    미국 : 전사 + 부상 약 3,600명 (전사 부상 따로 확인 못한, 포로 확인 못함)
    폴란드 : 전사 약 100명, 부상 약 300명 (포로 확인 못함)
    영국 : 총 인명피해 약 14,000명, 영 공수부대 사망 약 1,100명
    전사 마켓작전(공수부대) 약 1100명, 전사 가든작전(30군단) 약 5,400명, 영국 마켓가든 총전사 약 6,500명
    마켓가든 실종 약 850. 포로 약 6400(거의 공수부대), 영국 공수부대 인명피해 총 약 8,000명/투입병력 약 10,000명
    정리하면 대략
    독일측 총 인명피해 약 10,000명
    연합국 총 인명피해 약 18,000명, 독일측 피해의 대략 2배.
    영국 공수부대 피해율은 사상자 포로 도합 80% 에 이를 정도로 공수부대원들은 분투.
    작전계획 수립 단계에서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대패한 상태지만 전선 붕괴로 역전되거나 할 상황은 전혀 아님.
    아른헴 후방으로 영국군 100만, 미군 300만은 여전히 건재하고 마켓가든 공세 실패로 전선이 잠시 정체되는 정도.
    작전이 성공했으면 1944년 종전, 실패하게 되면 45년으로 미뤄지는 정도. 도박할 가치 있었지만 성급 부실했던 작전수행.
    미국이나 영국은 세계대전 상황에서도 이 정도 인명피해 당하면 어마어마한 손실로 여겨집니다.
    바바로사 초기 소련군이 당한 손실은 단일 전투에서도 50만 쉽게 넘어가고 포로 또한 가볍게 수십만이 넘죠.
    소련군이 공세를 취할 때도 전투는 승리해도 보통 독일군 보다 몇 배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세계대전 갈 필요도 없이 한국전쟁 때 우리 국군 전투 피해도 규모가 큰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졸전 패배 없이 멋지게 승리만 하는 군대 없습니다.
    지난 수 백년간 지구상에서 가장 승률 높고, 결정적 승리를 거듭했던 군대 조차도,
    손가락질 당할만한 패배를 수 없이 겪으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패배가 미래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기념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기도 하죠.
    영국과 영연방의 대규모 삽질 사례인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영국을 넘어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안잭데이로 그들 전쟁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로 추념됩니다.
    안잭데이 기념 중 특히 터키의 상륙지점에서 벌어지는 행사는 영-호-뉴-터키 함께 참여합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터키에게도 상징성이 큽니다. 그 전투를 지휘했던 케말 파샤가 그 전투 승리를 기반으로
    패전한 오스만투르크를 대체하는 터키 공화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한 작전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입장에서는
    식민지 보호령이 아닌 독립된 군대로 함께 참전한 그들 국가 군대 정체성을 확립한 상징이 된 것이죠.
    아른헴 투입된 공수부대의 80%가 손실된 대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손실을 당하면서도 전투를 수행한 공수부대원들의 희생은 수치가 아닌 명예입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패배로 부터 전훈을 배워야만 하죠. 저들은 철저하게 그런 과정을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폴란드 관련해서 추가합니다.
      자유폴란드 정부는 1939년 런던에 망명했지만,
      전쟁 승리 후 귀국하지 못하고 끝까지 공산 폴란드 정부와 대립했습니다.
      바웬사의 자유노조가 승리해 민주정부가 들어선 직후,
      런던의 자유폴란드 망명정부의 깃발과 자유폴란드군의 정통성을 전달하고 해산했습니다.
      현재 폴란드 군의 정통성은 소련과 함께 싸웠던 공산 폴란드군이 아닌, 자유폴란드군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철의 장막 붕괴 후 폴란드는 나토에 가입하고
      나토의 군사 훈련에 특히 영국군이 지상군과 공군으로 꽤나 자주 투입되어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게시판에서 많이 언급되는 비운의
      폴란드공수부대 지휘관 소사보프스키 장군 역시 전후 상황 때문에 귀국할 수 없었고,
      그와 자유폴란드군의 희생이 결국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조국에서 인정받고 폴란드의 진정한 영웅이 되었죠.
      물론 대부분은 사망한 이후, 거기다 추가로 폴란드 공산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나.
      시간이 많이 늦어졌지만 영웅들은 결국 영웅이 됩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더욱 영웅을 부각시키죠.
      공산 폴란드 정부는, 자유폴란드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독일과 소련이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한 이후, 폴란드군 장교단에 대한 대량 학살을 자행한
      소련측에 공산 폴란드 정부는 항의하기는 커녕 진실을 감추기만 했었죠. 공산 폴란드 정부의 위선은
      결국 민주정부 들어선 이후 다 드러나게 되고. 그 사건만으로도 폴란드의 정통성은 자유폴란드 정부에 있고.
      영국항공전, 이태리 전선의 몬태카지노, 아른헴 등이 자유폴란드군이 분전했던 대표적인 전투들이죠.
      거기다 독일 에니그마 암호 해독 최초로 성공한 것도 폴란드였고 폴란드 망명정부가 영국에
      제공한 자료들로 부터 영국의 독일 암호 해독이 시작된 겁니다.
      영국은 폴란드에 큰 빚을 진 셈이죠.
      영국항공전의 유명한 폴란드 공군 에이스는 전후 귀국해
      폴란드 공산정권 하에서 공직을 맡으며 전후 재건에 참였지만, 공산정권으로 부터
      서방 스파이로 몰려 엄청난 고난을 겪기도 했었죠. 그런 이유로 많은 폴란드인들이 귀국할 수 없었습니다.

    • @defeatube
      @defeatube  Před 4 lety

      귀한 자료들 감사합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4,500년간 전투 승리 횟수 국가별 랭킹 : BC2,500~2,017년, 위키디피아 오른 전투들, 중요도 무시 오직 횟수, 내전 포함.
    czcams.com/video/HK5OsDWYJmQ/video.html
    1위 프랑스 1,115회 , 2위 영국 1,105회 , 3위 미국 833회 , 4위 러시아 491회 , 5위 독일 425회
    6위 스페인 387회 , 7위 폴란드 344회 , 8위 로마 259회 , 9위 중국 244회 , 10위 터키 210회
    위키디피아 등재된 전투가 어떤 규모 이상인지 아니면 규모 상관 없이 역사 기록에 남은 전투 모두인지 모름.
    승률이 아닌 승리 횟수만을 반영한 통계. 프랑스가 횟수로는 근소한 차의 1위지만, 승률로는 1위는 아닌 느낌.
    2차대전 대서양에서 벌어진 해상 전투들은 나타나지 않는 것 같군요. 4,500년 전체 관점에서는 미미한 오류.
    하지만 프랑스와 영국의 미세한 차이는 역전되고도 남을만한 누락임도 분명합니다. 영국은 수 백년 동안 해상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강대국으로 거듭났는데, 대규모에 결정적인 해상 전투들도 누락된 느낌.
    마찬가지로 항공전도 빠진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4,500년 장기 통계엔 거의 영향은 없고.
    세계지도에서 전투 발생을 점으로 나타내며 승리 횟수 높은 국가 순으로 자막이 나옴. 인용된 총 전투 수는 약 10,600개
    전투의 중요도 가중치 없이 모든 전투를 1회로 단순 평가. 내전에서의 전투 또한 1회로 취급해서 실제 타국과의 전쟁에서
    군대의 강력함을 반영하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측정해도 결과는 현재 강대국들 다 포함.
    비스마르크 통일 독일제국에서 1,2차 대전 까지 막강했던 독일이 5위로 조금 낮은 평가인듯 하지만, 4,500년의 누적임.
    로마는 로마공화정과 제정로마를 모두 합산했는데, 생각 보다 전투 횟수가 많지 않아 승리 수도 적은듯. 너무 강해 적들
    이 미리 굴복해서 전투 횟수가 줄었을 수도 있음.
    중국의 경우는 주로 한족 왕조만 따진 것 같음. 몽골 등이 별도로 계산. 하지만
    청나라는 중국으로 환산됨. 즉 국적 분류가 딱부러지게 쉽지만 않고 애매할 수가 있음.
    청 등이 중국으로 분류되었다면, 한족 주도의 중국의 승리 횟수와 승률은 추가로 하락하게 됨.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같은 횟수, 그 두 나라 사이의 전투가 아마도 상당한 비중일 것임. 백년전쟁 여파로.
    프랑스는 승리 횟수로 간발의 차이로 영국에 앞선 1위지만, 결정적 전쟁에 패한 충격이 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1위 아님.
    나폴레옹 때문에 프랑스의 1위가 결정된듯. 하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특히 보불 전쟁 부터 프랑스는 중요한 전쟁에서
    패배한 취약점이 있음.
    프랑스의 승리에 노르만 정복을 포함한다면 수정 필요. 노르만 정복의 승리로 현재의 영국이 완성되니까 영국의 승리,
    영국의 내전 횟수로 기록해야 되는데 파악할 길은 없음. 노르만과 앵글로색슨 왕가는 애초 친척지간. 친척간의 왕위 다툼.
    미국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3위. 하지만 남북전쟁으로 내전에서 승리 횟수도 상당히 많음. 폴란드 전투 승리 많은 편.
    폴란드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세계사에서 막강했던 세력들이라 간단한 어림셈도 상당히 정확한 결과를 낸듯.
    2. 거의 같은 자료, 세계지도가 아닌 국가별 통계로 1위~100위 까지 나열한 랭킹 총 전투 횟수는 약 12,000회로 더 많음.
    czcams.com/video/xgLKVaJwpXY/video.html
    1위 2위 ...10위 결과는 1번 자료와 동일함. 승리 횟수도 같거나 거의 같음.
    미국은 역사가 아주 짧지만, 남북전쟁 이후 1차 2차대전 참전과
    2차대전 이후로는 현재 까지 꾸준히 계속 전투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3위에 오른 것 같음.
    영국은 2차대전 이후에도 미국과 거의 같은 전장에서 함께 전투하기 때문에 승리 횟수도 늘고.
    저런 통계를 분석한 사람이 외국에 존재한다는 것, 사용된 원본 데이터에 상당한 오류나 누락이 있을 수 있지만,
    크게 크게 보았을 때 지난 4,500년간 역사의 큰 흐름을 파악하게 하는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 시야 대단히 넓은 것.
    개인적으로 정리한다면,
    1. 4500년간 전쟁이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은 유럽.
    2. 주관적 가중치 부여하면, 가장 강력한 전투 민족은 영국
    범게르만의 일족으로 통합한다면 영국 미국의 앵글로색슨과 독일.
    미국의 인구 구성 조차도 잉글래드-스코틀랜드-웨일즈-아일랜드를 통칭한 영국과 독일이 합이 백인의 압도적 다수.
    3. 1차 2차대전 독일의 막강함이 인상적이었지만, 미국이 독일 아닌 영국으로 부터 건설되었듯 영국의 영향력 결정적.
    4. 영국은 과거나 지금이나 군대의 규모, 병력 수에서는 다른 경쟁국 보다 작지만 승리가 많다는 것.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미 육사의 샌드허스트 경연에서 영국과 영연방에 미국 조차 압도당하고 있음.
    그 원인은 소규모지만 꾸준히 어디선가 계속 전투 중이고, 그 전훈을 지속 엎데이트 하는 걸로 추정.
    5. 위키디피아에 등재된 기록은 일단 영어가 압도적이고 분석하는 사람도 영어 자료를 분석했을 듯.
    따라서 영어권 아닌 지역의 전쟁이나 전투 기록은 영어로 올리지 않는 한 분석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 대륙에서 고대 발생한 전쟁들, 고대 몽골 초원의 전투들은 모두 배제되었을 것.
    즉 역사는 실제 사건 발생 여부를 떠나, 기록을 남긴 자들의 영향력이 더 크게 남음.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독일이 패배한 결정적 이유, 독일 영국 국가 및 룰 브리타니아 가사로 본 두 나라의 차이점.
    1. 독일 국가 1절 :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독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
    czcams.com/video/WO3NXx0k9-E/video.html
    한글 자막 있음
    2. 영국 국가 3절 : 왕이 법을 지키게 하고, 선정을 베풀게 하소서. (안그러면 각오하라. 매우 공손한 협박)
    czcams.com/video/Xm7CZvvsC64/video.html
    3. 룰브리타이아 : (외세의) 폭군들은 그대를 굴복시키지 못하리라, 영국은 결코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czcams.com/video/UKfXVm4fDw8/video.html 한글 영어 자막
    czcams.com/video/j_wYihc37dw/video.html 룰브리타니아 해군 버전, 자막 없음
    4. 러시아 국가 : 같은 선율의 4가지 변천 (동영상 화면 맨 위 볼세비키, 다음 2개 소비에트, 맨 아래 현 러시아)
    czcams.com/video/SjVCTQsUDIk/video.html :
    볼세비키당, 소비에트 찬가는 공산당, 레닌, 스탈린이 가사에 등장하고, 자유-정의-영광 등이 나열됩니다.
    독일 1절과 소련 가사는 철없는 열정과 가슴 벅찬 감동이, 차분해진 이후 오그라듬으로 바뀔 수준.
    과거 독일이나 소련은 세계 패권을 가질 기본 자격이 안됨을 바로 알 수 있죠. 다행히 현재 독일은 솔직히
    미국 영국 보다도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공동체로 거듭난듯 합니다. 러시아는 푸친의 종신 대통령 시도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불길하게도 과거 영국 미국과 달리 현 미국과 영국은 수준이 많이 낮아진 느낌.
    하지만 과거 독일과 영국 두 나라만 비교,
    두 나라의 국가 가사를 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국가와 룰브리타니아에서도 차이가 보이는데, 그 차이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죠.
    내부에선 왕은 국법을 지켜야 하고, 대외적으로 외세의 침략 폭압에 굴복해 노예가 되지 않겠다. 독일과 다르죠.
    1. 독일 국가 : 1840년대 독일민족주의 고취, 로 등장, 사실상 독일 국가로 지금 까지 이어짐.
    1절은 매우 전투적, 2절은 독일의 자랑거리, 3절은 오늘날 국가로 채택. 1절 등은 오늘날은 사용하지 않음.
    1절은 주변국들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작용했을 겁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독일어 사용 지역 휩쓴 민족주의 광풍.
    자존감 자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나쳐선 안되죠. 그 부작용, 댓가 훗날 독일이 피할 수 없었던 것.
    1절
    독일,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독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
    방어와 공격의 정신으로
    형제처럼 서로 함께 단결하면
    마스에서 메멜까지
    에치에서 벨트까지
    독일,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독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
    2절
    독일의 여인은, 독일의 성실은,
    독일의 와인은, 독일의 노래는,
    온 세계에 간직되어야 하리라
    이들의 오랜 아름다운 메아리는
    우리의 온 일생에 걸쳐
    고귀한 행동을 고무하였도다
    독일의 여인, 독일의 성실,
    독일의 와인, 독일의 노래!
    3절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조국 독일을 위하여!
    이를 위하여 우리 모두 형제처럼
    마음과 손을 모아 노력하자!
    통일과 정의와 자유는
    행복의 증표가 될지니,
    이 환희의 광채 속에서 피어라
    피어나라, 조국 독일이여!
    2. 영국 국가 :1745년 공식 국가, 이미 입헌군주정 상태에서 채택. 국왕이 국법을 수호해야한다는 내용 포함.
    영국 국가도 전투적인 것은 마찬가지고, 특히 2절, 6절 등 많은 부분은 사라지고 1절, 3절 사용.
    6절 스코틀랜드에 대한 적개심이 나오는데 나중에 폐지. 다른 나라를 자극 제국주의 속성이 강한 2절도 폐지.
    영국 국가의 선율은 원래 오래 전 프랑스에서 이미 나타났으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국가로 사용.
    3절이 독일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 왕이 법을 수호할 때만 마음을 다해 충성할테니, 선정을 베풀라!
    아주 공손하게 충성을 다짐하지만, 조건이 붙은 충성이죠. 법을 준수하라.
    1절
    신이여, 자비로우신 여왕/왕을 지켜 주소서.
    고귀하신 여왕/왕 만수무강케 하사,
    신이여, 여왕/왕을 지켜 주소서.
    여왕/왕께 승리와
    복(福)과 영광을 주소서.
    군림케 하소서.
    신이여, 여왕/왕을 지켜 주소서.
    2절
    오, 지도자이신 주님, 일어나시어
    여왕/왕의 적들을 변방으로 흩으사
    패배하도록 하소서.
    그들의 정치에 혼란을,
    그들의 간교한 계략에 좌절을.
    당신께 저희의 희망을 거노니
    저희 모두를 보우하소서.
    3절
    그대의 최상의 선물을
    여왕/왕께 부어주소서.
    여왕/왕을 군림케 하소서!
    여왕/왕이 우리 법을 수호케 하시길,
    우리가 마음과 목소리로 찬양할 수 있도록.
    선정을 베풀게 하소서.
    신이여, 여왕/왕을 지켜 주소서.
    6절
    주님, 저 원수(元帥)로 하여금
    당신의 가호와 함께
    그의 승리를 허락하소서
    반역을 퇴치하여,
    그분이 성난 노도처럼,
    모반하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부수기를!
    신이여, 여왕/왕을 지켜 주소서.
    3. 영국 제2의 국가나 다름 없는 룰 브리타니아 : 1740년대 노래. 거의 300년이 되어가는군요.
    룰 브리타니아 2절도 다른 나라를 자극할 우려가 있어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페지 되었습니다.
    독일 국가 1절은 전세계 위에 군림하는 독일,
    룰 브리타니아는 외세 폭압에 노예가 되지 않겠다. 다른 나라들이 느끼는 위협의 강도는 다르겠죠.
    독일이 다굴당할 가능성이 더 크고, 영국이 동맹을 확보할 가능성이 더 크겠죠. 실제 역사도 그랬습니다.
    전세계 위에 군림하겠다는 독일, 전쟁에서 독일편 누가 들겠습니까?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투쟁하지.
    1절
    브리튼(영국)이 천명에 의해,
    푸른 망망대해로부터 솟아났을 때
    그 땅에 내려진 헌장 있었네,
    또한 수호천사들은 이 선율을 노래했다네
    (후렴)"지배하라 브리타니아! 파도를 지배하라!"
    "영국인은 결코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2절
    그대만큼 축복받지 못한 국가들은,
    반드시 차례로 그들의 폭군의 파멸로 이르리니,
    그대가 위대하고, 자유로이 번성할 동안
    다른 국가 모두에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 될지니!
    (후렴)"지배하라 브리타니아! 파도를 지배하라!"
    "영국인은 결코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3절
    여전히 위엄 있게 일어설 그대여!
    외세의 일격으로부터 더욱 강해지리!
    하늘을 찢을 천둥마저도
    그대 토양의 떡갈나무만 더욱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리라.
    "지배하라 브리타니아! 파도를 지배하라!"
    "영국인은 결코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4절
    고집 센 폭군들은 그대를 절대 굴복시키지 못하리:
    그대를 꺾기 위한 그들의 모든 시도마저도,
    단지 그대의 자애로운 불꽃만 더욱 키우리라
    허나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라, 그대의 고명은 더욱 높아질테니!
    (후렴)"지배하라 브리타니아! 파도를 지배하라!"
    "영국인은 결코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몽고메리 : 정복왕 윌리엄 휘하의 정복군 후손, 1000년 전 출발지 노르망디로 역상륙
    1066년 노르만 정복, 정복왕 윌리엄은 노르망디에서 출발해 노르만 바이킹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정복합니다.
    그 정복군에 가담한 군인의 후손이 약 1000년 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지상군 최고사령관 몽고메리.
    몽고메리 자신도 자신의 이름에 얽힌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 이름 부터 웬지 영어 같지 않은 느낌이 들죠. 그렇습니다. 프랑스 계통의 이름입니다.
    알프스의 몽블랑, 몽은 마운틴, 블랑은 화이트,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백두산.
    몽고메리의 몽은 바로 불어로 산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몽고메리는 고메리 산이라는 것이죠.
    노르망디의 한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을 딴 지명에서 유래된 성씨인 겁니다.
    몽고메리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1000년의 세월을 건너 뛴 우연이라고 보기 애매한 사건에 대한 소개로 글 올립니다.
    1000년 전 조상이 침공군으로 출발했던 땅, 후손이 1000년 후 침공군을 이끌고 되돌아온 노르망디.
    바이킹의 일족이 프랑스 북서부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행패를 부리자,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던 프랑스 국왕은 그 우두머리를 영주에 봉하고 점령된 지역을 영지로 하사해 달랩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노르만족, 그들이 사는 땅이라는 말 뜻의 노르망디.
    프랑스 국왕의 신하 영주로서 노르만공.
    하지만 1066년 노르만 정복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노르만족의 위세는 극에 달해 프랑스 내부의 영지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 보다 넓은 정도에 달했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00년 전쟁이 터지고, 최종적으로는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잃고 영국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100년 전쟁의 패배, 패배였지만 새로운 출발 이었습니다..
    노르만 지배층과 앵글로색슨 피지배층이 프랑스 영토를 상실한 이후 하나의 국민 국가로 거듭나게 되죠.
    영화로도 유명한 헨리5세 시절이면 이미 왕족과 귀족들도 국민 다수의 언어인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미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러더스, 그 어원이 바로 아쟁꾸르 전투와 헨리5세 입니다.
    병력의 압도적 열세로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자, 헨리5세가 그들을 격려한 겁니다.
    이 전투에 참여-지원하지 않고 고국에서 편하게 지내는 귀족들 사람들은 후회할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함께 피흘리며 싸우는 우리는 국왕, 귀족, 평민 신분의 차이를 넘어 진정한 형제다. 형제들의 모임 무리!
    참고로 헨리5세는 승리 후, 잉글랜드와 프랑스 통합 국왕에 오르지만 얼마 안되어 이질인가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죠.
    프랑스어가 섞인 노르만 바이킹의 언어가,
    대다수 앵글로색슨의 고대 게르만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오늘날의 영어가 되었습니다.
    또한 바이킹의 사법제도, 관습 등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오늘날 영미법의 근간인 배심원제 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즉 노르만 정복으로 오늘날 영국, 그 영국에서 갈라져 나간 미국이 생겨난 겁니다.
    브리튼 제도,
    로마 시절 로마화된 문명화된 켈트족들이,
    로마에 저항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로 쫒겨난 켈트를 두려워해,
    로마군 철수 이후 동족인 야만족 켈트를 막기 위해 용병으로 독일 북서부와 덴마크에 거주하던
    앵글로색슨을 고용했고.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용병이 주인을 쫒아내고 잉글랜드 왕국을 건설한 겁니다.
    그 잉글랜드 왕국 조차 최종적으로 노르만 바이킹에게 정복되어 오늘날 영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노르만 정복자들의 수가 워낙 적어 그들은 결국 앵글로색슨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죠.
    원래 거주자 켈트, 굴러들어와서 박힌 돌 빼낸 앵글로색슨, 앵글로색슨을 정복한 바이킹 노르만, 그 모두가 뒤섞인 공동체.
    참고로 잔다르크 말 뜻은 잔 of 아크 : 아크 라는 동네의 잔, 불어로 of 는 de 드, 발음은 연음되어 잔드아크 아닌 잔다르크.
    몽고메리 이름도 원래는 앞에 de 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 de 몽고메리, 몽고메리 동네에 사는 ~~~
    < 몽고메리 이름에 대한 인용입니다.>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Gomeric의 산'이란 뜻의 옛 노르망디어에서 왔다고 한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서부의 지방으로 바이킹으로 알려진 북유럽인들, 즉 노르만족이 정착한 땅이다. 노르망디어는 노르만족의 원 언어가 아니라 노르망디에 정착한 후 사용하게 된 현지 방언으로 프랑스어와 같은 방언군에 속한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가장 흔한 철자는 Montgommery이며 발음은 [mɔ̃ɡɔm(ə)ʀi] '몽고므리'이다. '몽곰리'로 적으면 [몽곰니]로 발음하기 쉬우니 [ə]가 발음되는 것으로 보고 '몽고므리'로 적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르망디에는 아직도 생트푸아드몽고므리(Sainte-Foy-de-Montgommery), 생제르맹드몽고므리(Saint-Germain-de-Montgommery), 콜빌몽고므리(Colleville-Montgomery) 같은 지명이 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해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신하 로제 드 몽고므리(Roger de Montgommery) 역시 이때 잉글랜드에 건너갔으며 후에 초대 슈로즈베리 백작(Earl of Shrewsbury)이 되었다. 이후 몽고메리라는 이름은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도 퍼졌으며 영어권에서 흔한 이름이 되었다.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1

    미 웨스트포인트, 샌드허스트 경연 역대 우승 : 영국과 영연방이 압도 1994년 이후 기록
    역대 우승 : 영영영...영영캐캐캐...호..., 최근 들어 미국 등장. 특히 영국 11년 연속 뒤 캐나다 3연속. 그 뒤 영캐호
    미군이 세계 최강이기는 하지만, 일정 부분은 규모 탓이기도 합니다.
    질적으로, 같은 규모거나 만일 동일한 장비가 주어진다면 과연 미군이 최강일지 여부는 아무도 모르죠.
    샌드허스트 경연대회는 1960년대 웨스트포인트에
    교환 방문했던 영국 장교의 제안으로 미 육사에서 실시된 경연 대회입니다.
    그런데 그 대회는 놀랍게도 미국이 영국과 영연방 소속 사관학교들에 압도당해버립니다.
    (우승팀에 수여되는 영 샌드허스트 지휘검 때문에 붙은 이름)
    영국 육사 샌드허스트는 미국이나 대한민국과 같은 4년제가 아닙니다.
    대학 졸업 또는 전문대 졸업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입교해서 군사교육을 받고 임관되는 곳입니다.
    (구태여 우리식으로 따진다면, 대한민국 3사관학교와 더 유사한 군사 교육 기관)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제도, 일반 대학 학부 과정은 입교 전 사회에서 마치고 들어가니까)
    (대한민국 경찰대, 육해공 사관학교, 의무사관학교 과연 학부 교육 포함한 현 시스템 유지해야할까요?)
    생도 수도 미 육사에 비하면 작죠. 영 샌드허스트에서는 단 2개의 팀이 출전합니다.
    보통은 샌드허스트1,2 또는 샌드허스트 A,B 또는 샌드허스트 RED, BLUE
    아래 첨부한 기록은 1994년 이후의 기록들입니다.
    도대체 왜 저런 성적일까요? 영국은 이해하겠는데, 캐나다 하고 호주는 왜 또 그럴까요?
    호주는 인구가 적어 우리와 같이 육 해 공 사관학교
    따로 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국방 사관학교 안에서 육 해 공 생도들로 전공이 달라집니다.
    캐나다도 그럴 수도. 그런 소수의 캐나다와 호주 생도들은 도대체 통합 훈련 과정이 뭐여서 저런 결과를 낼까요?
    아마도 영국에 11연속 우승 헌납하고, 그 다음에 캐나다에 다시 3연속 우승 뺐기면서 미군 맨붕 왔을 겁니다.
    미국이 우승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발버둥쳤겠습니까? 홈그라운드에서 저리 되었으니.
    저런 경험을 한 웨스트포인트 출신 미 엘리트 장교들 영국군에 심리적으로
    위축 안된다고 할 수는 없겠죠. (아마 마음 속으로 우리는 물량빨, 저들은 질, 그렇게 위축될 수도)
    더구나 샌드허스트는 영국이 가장 취약한 육군 소속으로서 저렇게 강력한 경쟁력 내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21세기 현재 샌드허스트 경연으로만 본다면,
    지구 최강의 전투 민족은 앵글로색슨이 맞습니다. 미국도 그에 속할테니. 그 중에서 원조가 더 쎄고.
    여기 게시판의 많은 사람들은 2차대전 영국군에 대해, 몸사림이 심하고, 좀 무능한 쪽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고 볼 객관적 근거는 별로 없을 수도. 2차대전 때 과연 미군이 영국군 보다 군사 훈련 더 내실 있게 받았을까요?
    미국의 거의 모든 특수전 부대들의 조상이 2차대전 영국 SAS 등이고 실제 초창기 부대 창설이나 훈련에서 영국
    지원이 많았죠. 2차대전 당시 미 특수부대 일부 스코틀랜드 험지 등에서 영국군에게 교육 받고 전투에 투입되었죠.
    2차대전 때 미군에 비해 형편 없던 영국군이 전후 개과천선해서
    달라졌다고 보긴 어렵고, 애초 부터 그들은 저랬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당시 세계 대전에 처한 영국 사관학교들이 평시인 지금 보더 널널했거나 군기 빠졌을 이유는 전혀 없을테니.
    저런 영국군이 2차대전에서 독일군 앞에서 주눅들었으니 독일군의 막강함은 상상을 초월했음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원인이 있죠. 영국의 저런 사관학교 교육 제도 자체도, 구 프로이센의 장교 교육 과정을 도입한 것일테니.
    지금은 완전 역전된 상태입니다. 독일 생도들도 참여하지만 성적은 별로.
    1960년대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한 영국 장교가 보기에
    미 육사 교육 과정에 뭔가 빠진 것이 있다고 여겨 경연을 제안했을지도.
    대한민국 육군 사관 생도들도 얼마 전 부터 참여 중인데, 성적은 아직 까지는 상위권 아닙니다.
    ------- 샌드허스트 경연 대회 역대 성적, 1994년~2019년 (영어 위키)
    Winning squad
    2009's champion squad: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Since 1994, when RMA Sandhurst began competing, either a Sandhurst squad or a RMCC squad won every competition until 2011 when Company B-3 of West Point won.[4] The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took the honours for the fifth time in 2016.
    2019 - USMA Black
    2018 - United States Air Force Academy
    2017 - USMA Black
    2016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15 - Sandhurst Red
    2014 - Sandhurst Blue
    2013 - Sandhurst Blue
    2012 - Royal Military College of Australia - Duntroon
    2011 - USMA B-3
    2010 - Sandhurst A
    2009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8 - Sandhurst Red
    2007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6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5 - Royal Military College of Canada
    2004 - Sandhurst Red
    2003 - Sandhurst Blue
    2002 - Sandhurst Red
    2001 - Sandhurst Blue
    2000 - Sandhurst 2
    1999 - Sandhurst 1
    1998 - Sandhurst 2
    1997 - Sandhurst 1
    1996 - Sandhurst 1
    1995 - Sandhurst 1
    1994 - Sandhurst 1
    References
    Sandhurst 2010. Department of Military Instruction. USMA website. Retrieved 2010-06-28.
    "43rd Sandhurst is Friday and Saturday". Pointer View.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April 22, 2009. Retrieved 2009-04-20.
    "Sandhurst Manual: History". Department of Military Instruction. Retrieved 2009-04-20.
    "Sandhurst Historical Results". Department of Military Instruction. Retrieved 2009-04-20.
    ----------샌드허스트 경연 대회 기원에 대해 첨부
    History[edit]
    A U.S. Air Force Academy Cadet crosses one-rope bridge in 2004.
    In 1967, the Royal Military Academy Sandhurst (RMAS) presented West Point with a British officer's sword. The intent was for the sword to be the prize for a competition, the aim of which was to promote military excellence among the Corps of Cadets. The original purpose statement read as follows - "To provide the Corps of Cadets with a challenging and rewarding regimental skills competition, which will enhance professional development and military excellence in selected soldier skills." Between 1967 and 1975, the competition criteria were similar to those for the current Superintendent's Award, that is: Varsity Athletic participation, Intramural sports performance, physical fitness tests, drill and ceremonies and Cadet Brigade Company evaluations.
    In 1975 the then Commandant, BG Philip R. Feir and the British Exchange Officer, Major Robert Hodges, KORBR, studied the criteria and determined that they were inappropriate. They felt that the criteria fell short of the original intent of the award which was to increase 'military excellence in the field'. More specifically they recommended that the format be changed significantly to test the cadets' ability to "shoot, move, and communicate", stressing teamwork among the classes as a fundamental and essential element in the competition. Thus the competition was set up to be conducted in the Spring during drill and intramural time to include the following - equipment inspection, communications, weapon handling, swift movement, shooting and land navigation. All 36 companies provided 5 four-man patrols and one alternate patrol per company, with all four classes represented in each patrol. Over 864 cadets competed each year, or 20% of the Corps. The competition was conducted at Camp Buckner during 20 weekdays in April. The logistical problems of the program led to calls for it to move to Summer Training, and so in 1981, a major placement study took place. It concluded that the advantages of conducting it in the Spring outweighed the disadvantages, and also recommended that it should take place at West Point. So in 1982, the competition was run in two phases, again in April, in roughly the same format, with a navigation course on one day, set by the orienteering club, and the firing of the M16 sub-caliber device in the indoor range.
    In 1986 it was decided that the teams should complete the competition on a single day, to include firing the M16 on an outdoor range. In 1988 company team composition changed to 2 nine person squads including one female, instead of the 5 four-man patrols. From 1992 onwards, one team of nine from each company have competed, together with a varying number of ROTC teams. Since 1993 two teams from RMA Sandhurst have taken part, and from 1997, a team from RMC Canada has also participated. 2002 saw a further increase in the number of external teams competing; including a team from Germany (to help mark the Bi-Centennial Competition), and teams from the Naval, Air Force and Coast Guard Academies. The 2003 Competition saw the German Team replaced by the Merchant Marine Academy.
    The Reginald E. Johnson Memorial Plaque is awarded to the competition's highest scoring squad each year. It is commemorated to team leader Cadet Reggie Johnson who died while taking part in the land navigation phase of the competition on Friday, 11 April 1980. The original plaque was replaced in 1999 with a mounted cadet sabre, to be presented annually to the best team. The competition was won for the first time by RMC (Canada) in 2005 and they successfully defended their title during both the 2006 and 2007 Sandhurst Competitions.[3]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샌드허스트 경연 대한민국 육사팀 성적
      2013년 : 52위 58개팀중, 첫 출전 충격으로 다음 해 출전않고 철저히 준비
      2015년 : 12위
      2016년 : 13위
      2017년 : 22위
      2018년 : 34위, 64개팀중
      2019년 : 26위, 가장 최근 성적
      첫 출전에서의 충격으로, 웨스트포인트 출신
      주한미군 장교에게 과외 논란등이 있었지만 사실 아닌 걸로 밝혀짐.
      캐나다가 미국 보다 전체 우승 횟수가 더 많음.
      영국은 우승 못해도 거의 2~3위권 유지. 초창기에는출전팀 2팀이 모두 1위, 2위 동반 석권.
      미국은 영국과 영연방국에 연속 우승을 너무 많이 빼았겨, 우승만을 목표로 특별 과외 훈련했을 가능성 있음.
      최근에는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국과 영연방팀은 평소 교육 훈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출전할 여지 있고.
      여기 게시판에서 넘치는 자신감에
      북아프리카 영국군의 잦은 패배에 물량빨, 병력빨로 겨우 이긴 것이라 폄하기도 하고,
      노르망디 전역에서 영국군의 지지부진한 전투 상황에 대해 그 무능함에 참을 수 없어하는 분들 꽤 되는데
      당시 영국군도 멋지게 쾌속 돌파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안되었던 현실을 조금은 고려해야 할 겁니다.
      당시 영국군 최고 지휘부나 초급장교들은 샌드허스트식 교육 받고도 실전에서 그렇게 당한 겁니다.
      샌드허스트의 원조 격인 구 프로이센 장교 교육 과정이 훨씬 더 강력하고 효율적이어서.
      여기 게시판의 다수는 당시 까앵 전선에서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보이지만, 현실은 아닐 겁니다.
      아마추어가 아닌 대한민국 육사 생도들, 당시 전사에 정통하고, 웨스트포인트의 경연에 대해 더
      잘 아는 우리 생도들 역시 입학하기 전 아마추어 매니아일 때와는 생각 달라졌을 겁니다.
      지난 수 백년, 인류 전쟁사에서
      영국군은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고,
      훨씬 경미한 손실과 피해를 당해오면서, 상상도 못할 거대한 승리와 전과를 거둔 군대.
      물론 1차대전 참호전의 대량 인명 손실도 있지만, 그 역시 다른 참전국들은 더 큰 손실과 피해를 봤고.
      영국은 6년간의 2차대전에서
      1차대전 보다 적은 민간인 포함 45~50만 인명 손실을 당했습니다.
      한국전 때 중공군은 90만, 남북은 합해서 가볍게 100만 이상의 인명 피해를 입고 전쟁 출발점에서 휴전.
      2차대전 인명 손실 독일 500만 넘고, 소련은 1000만 단위입니다. 2000만 될 수도.
      최종적으로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 전쟁 수행을 했는지, 물량과 병력 낭비를 했는지 너무나 확연한 격차.
      2차대전 전체를 볼 때,
      가장 저효율에 물량빨과 병력빨 모두에 해당하는 것은 소련!
      물량빨은 확실한 미국!
      상대적으로 가장 물량 투입 적었고, 병력 투입도 적었던 영국!
      전투 효율은 높았지만, 결과적으로 거대한 손실과 피해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독일!
      2차대전 영국 총평한다면, 겨우 이겼죠.
      하지만 물량빨과 병력빨로 겨우 이겼다고 할 수는 없죠.
      2차대전 영국, 상대적으로 물량과 병력이 너무 부족해서 겨우 이긴 겁니다.
      만일 2차대전 개전초 영국군이 독일이나 소련과 같은 수 백만 병력이 있었다면 아르덴 전격전 돌파 가능했을까요?
      그 수백만 병력의 일부로 개전초에 북아프리카에 한 30~40만 병력이 있었다면 롬멜이 묘기를 부릴 수 있었을까요?
      북아프리카에서 이태리와 교전에 돌입하는 순간, 북아프리카 영국군은 5만 내외 밖에 배치되지 않았습니다.
      그 적은 병력에서 일부는 또 그리스로 파병하고, 영국은 병력에서 언제나 부족했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구가 4000만으로 주요 열강 중 가장 적었기 때문.
      소련 1억5천만, 미국 1억 넘고, 독일은 이미 1차대전 때 6500만 이상.
      영국이 삽질한 자잘한 개별 전투 사례로
      영국의 2차대전 전쟁 전반에 대한 판단을 오판해선 안됩니다.
      개별전투 수준에서의 비효율과 삽질은 어느 국가 군대나 피할 수 없는 병가지상사.
      참여한 모든 전투에서 깔끔 효율적으로 승리하고 전쟁 마저 적은 손실로 승리로 마무리한 경우 찾기 힘듭니다.
      그런 경우 있다고 해도 소련, 독일, 미국이 아닌 영국일 가능성이 크죠. 예를 들면 아편전쟁.

    • @scz8333
      @scz8333 Před 4 lety

      웨스트포인트, 샌드허스트, 대한민국 육사 교훈(모토)
      1. 웨스트포인트 : duty, honor, country (의무, 명예, 국가)
      2. 샌드허스트 : serve to lead (이끌기 위해 헌신하라)
      3. 대한민국 육사 : 지, 인, 용
      웨스트포인트와 대한민국 육사는 판박이 구조죠. 추상적 개념의 나열. 갯수도 3개.
      어릴 때는 의무, 명예, 국가 저런 단어들 보면 가슴 벅찼는데 최근에 좀 오그라드는 느낌도.
      샌드허스트는 아주 실용적입니다. 추상성이 거의 배제된.
      웨스트포인트에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당신이 속한 국가와 군인의 명예를 위해 당신의 의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에 대한 내용이 없죠. 목표만 나열된 겁니다. 듣기 좋고, 보기 좋은 단어의 나열 성격이 꽤 있죠.
      영국 샌드허스트는 추상적 목표 따위는 생략.
      바로 생략된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 방법으로 직행합니다.
      초급 장교 교육 기관으로서 부대를 이끌기 위한 가장 합리적 방법, 이끌기 위해선 헌신 봉사 솔선하라.
      저런 차이가 작지만 작지 않은 차이일 수 있습니다.
      최강대국 정규 육사로서의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이, 추상적 뜬 구름 잡는 모토 속에서 자부심 가질 때,
      영국 샌드허스트 생도들은 지극 현실적인 교과 과정에 더 충실하게 임했을 가능성이 크고,
      게다가 학부 과정은 입학 전 이미 마친 상태라 바로 실전적 현실적 군사교육에 치중할
      가능성이 커 웨스트포인트에서 벌어지는 경연에서 미국을
      압도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참고로 샌트허스트 졸업시 주어지던 학사학위 현재는 폐지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입학생들이 모두 기본적으로 학사학위 정도는 가진 상태라 있으나마나한 학위 수여라서.
      사관학교 교훈, 모토, 구호 조차도 실용성이 배제되면 반드시 헛점을 더 키울 수 있습니다.
      4년제 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가
      2년제 사관학교인 샌드허스트에 압도당하는 경연을 볼 때,
      사관학교 제도, 학부 교육을 포함하는 4년제 제도가 과연 합리적인지 의문이 듭니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느낌.
      애초 목표는 유능한 똑똑한 어린 학생을 다른 대학에 빼앗기지 않고 선취하기 위해 4년제 도입했겠지만,
      샌드허스트 경연 대회 결과를 보면, 그렇게 선취한다고 뭐 달라진 것도 없어 보입니다.
      미국도 선취되어 입학한 학생들의 자부심 우월감에 비해 가성비가 별로.
      오늘날 평균 수명도 옛날과 달리 많이 길어져.
      대학 과정이나 군복무 등으로 4년 2년 늦게 생도된다고 큰 문제 발생할 것 같지도 않고.
      직업군인으로서 평생을 몸담을 각오를 한
      4년제 및 2년대 졸업생 이나 사병 부사관 출신의 입학생을 받는 사관학교가 더 나을 수도.
      간호사관학교, 일반 간호대 졸업생 내지는 2년 정도 수료한 인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교육 기관이 더 나을지도.
      경찰대, 이미 거의 모든 경찰 인력이 대졸 이상이므로
      경찰 복무 중인 인원이나 대졸 전문대졸 대상으로 선발 교육하는 기관으로 바뀌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전 뉴스에서 경찰대생이 행패부린 것,
      폭행 사건 단속 나온 경찰관들에게 술취해서 너희들은 몇 년 후에 내 밑에 있을 넘들이라고 행패부리다 퇴교 당했죠.
      새파랗게 어린 졸업생이 경찰대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파출소장 급이 된다는 것, 제도적 허점 같군요.
      나이만 새파란게 아니라 인격 자체도 새파란 싸가지 수준으로 넘치는 자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