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해피, 자전적 인생그림책, 그림은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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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24. 01. 2024
  • 어머니와 해피
    글·그림 박종오
    나는 서천 읍성 안에 ‘박 과장댁’이라 불리는 집에서 살았다. 새총처럼 양쪽으로 가지를 뻗은 측백나무가 대문 옆에 있었고, 화장실 옆에 닭과 돼지를 키우면서 살았다.
    집 뒤엔 벽오동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집 앞에는 공동우물이 있었고 뒤꼍에 돌 틈으로 흐르는 맑은 샘물을 먹었다.
    어머니는 자상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해마다 가족들 생일을 잊지 않고 미역국과 팥밥을 해 주었다.
    설날이면 어머니는 잊지 않고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 주었다.
    선물은 양말과 내복, 신발과 의류 들이었다. 우리는 선물 받을 생각에 손꼽아 설날을 기다렸다.
    어릴 적엔 앵무새와 하얀 새들도 7~8마리나 키웠다. 아침에 새소리에 잠을 깨고는 했다.
    명절이면 우리는 무쇠로 만든 원형 목욕탕에서 가족 목욕을 했다.
    꽃밭 옆에 닭과 돼지를 키웠다. 닭은 알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돼지는 새끼를 팔아서 학비에 보탰다.
    어머니는 꽃을 좋아하셔서 마당 한 귀에 작은 꽃밭을 만드셨다.
    장미랑 목단, 국화와 매화, 채송화와 개나리와 봉숭아를
    심어놓고 툇마루에서 바라보며 즐거워하셨다.
    여름철에는 봉숭아꽃으로 초등학교 딸들에게는 물론이고
    아들에게도 물들여 주었다.
    암탉이 병아리를 부화해서 마당에서 병아리를 데리고 노는데
    어느 날 고양이가 병아리 한 마리를 물었다.
    깜짝 놀라 소리쳐 떼어 놓았지만, 병아리는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살아야 했다.
    고양이가 미웠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꼬꼬댁하고 울었다.
    나는 살금살금 닭장으로 들어가서 따끈따끈한 알을 꺼내오곤 했다.
    나는 수탉을 잡아 이웃집 수탉과 닭싸움을 시키고 구경하길 좋아했다.
    수탉끼리는 왜 싸움을 하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닭장 옆에는 돼지를 키웠다. 암퇘지가 새끼를 낳을 때면 볏짚으로 만든 거적으로 돼지우리를 어둡게 가렸다.
    어머니는 새끼들이 어미돼지에게 깔려 죽지 않도록 불을 켜고 밤새도록 돌보았다.
    적게는 7~8마리, 많게는 12마리에서 15마리도 낳았다. 돼지 사료는 음식물 찌꺼기와 쌀겨에 물을 부어 주었다.
    몇 개월 성장한 돼지 새끼 뒷다리를 새끼줄로 묶어서 손수레에 싣고 장날 시장에 가서 팔았다.
    나는 창피했지만 일을 많이 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손수레를 끌었다.
    다 팔리지 않으면 다시 집으로 싣고 되돌아와야 했다. 그때는 몸도 마음도 힘들었다.
    어머니보다 학식이 높으신 아버지는 애주가가 되셨다.
    지적이며 과묵하신 아버지는 말없이 미소를 지울 뿐 특별한 교육이나 지도는 없었다.
    나와 형은 날마다 막걸리를 사러 양조장에 통장을 만들어 놓고 하루에 한두 번씩 다녀왔다.
    아버지는 밥보다 막걸리를 더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매사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
    논일을 마친 어머니가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손수레를 끌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지프를 타고 지나가던 군수님이 내려와
    “우리 회장님이 훌륭한 일을 하신다”라고 항상 칭찬하시며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가을철이 되면 집안에서 탈곡하고 짚 누리를 쌓았다.
    논에서 벼를 소구루마에 싣고 와서 추수를 마친 뒤 집 앞에 놓이 쌓아 볏짚을 일 년 내내 땔감으로 사용했다.
    일꾼들을 위해 밥한 큰 가마솥에서 나온 푸짐한 깜밥이 너무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즐겨 하시는 분이셨다. 자식들이 집에 올 때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통 한두 시간 풀어 놓았다.
    어린 시절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 심청전이나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들려주시고는 했다.
    어머니는 16년간 어머니회장을 비롯하여 어머니 합창 회장, 김종필 국회의원 부위원장을 했으며, 여성저축회장을 할 적에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에 다녀온 적도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부모님은 다섯 남매를 대학까지 모두 졸업시켰다.
    대전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누나가 결혼 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월급을 모두 어머니께 보탰다.
    나도 그랬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어머니는 시루떡을 해놓고, 천지신명님께 가족의 건강과 복을 정성껏 빌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3년 상을 치렀다. 어머님의 정성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자식들이 하나둘 결혼하여 떠나고 막내가 결혼하여 멀리 떠나자 홀로 집에 계시기가 매우 외롭다고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스피츠 한 마리를 얻어 오셨다.
    새하얀 강아지는 영리하고 인형처럼 예뻤다.
    해피라는 이름도 어머니가 직접 지었다.
    해피는 다양한 재롱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하곤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줄 수 없는 사랑을 해피에게 주었다.
    언제나 맛있는 것을 주고, 해피를 더 챙기는 듯했다.
    어머니는 해피를 자식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워했다.
    해피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가족처럼 자랐다.
    어머니의 꽃밭은 해피의 놀이터가 되었다.
    쥐를 잡아 와서 두 발로 이리저리 툭 툭 치면서 장난하는가 하면
    두 귀를 쫑긋 세우고는 던져주는 고구마를 날래게 받아먹는 모습은 영리하고 멋져 보였다.
    해피는 어머니가 시장에 다녀올 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꼬리를 치면서 어머니를 반겼다.
    어머니가 “해피 해피”하고 부르면 먼 데서 놀다가고 헐레벌떡 집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느 날 이웃 동네에 사는 삽살개와 사랑을 나눈 해피가 새끼 세 마리를 낳았다.
    새끼들은 이웃들에게 분양되곤 했다.
    어머니가 노환으로 기력이 약해져서 요양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오랫동안 입원하게 되었고,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해피는 3년 동안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해피는 서산 너머 해가 질 때까지 울타리 밖을 맴돌면서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서서히 야위어 갔다.
    내가 해피에게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는 없었다.
    해피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도 툇마루 끝에 앉아 배를 납작하게 깔고 한없이 대문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해피의 모습은 무척 애처로웠다. 어머니가 없는 텅 빈 집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위어만 갔다.
    내가 본가에 들러 먹이를 챙겨 주어도 먹지 못하고, 까만 눈망울을 끔벅이며 얕은 숨만 헐떡였다.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고 반년쯤 지나 유난히 더웠던 여름날, 해피는 결국 어머니 곁으로 갔다.
    부모님 산소 옆에 해피도 묻혔다.
    그곳에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을 심었다.
    어머니와 해피가 없는 고향 집엔 아직도 장미꽃 향기가 가득하지만, 나에게는 쓸쓸함과 공허함만 마당에 가득할 뿐이다.
    하늘나라에서 해피는 어머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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