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숟가락, 자전적 인생그림책, 그림은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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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16. 01. 2024
  • 밥숟가락
    글·그림 박계순
    나는 아빠와 친했다.
    친구들은 아버지라 불렀지만, 나는 ‘아빠’라 불렀다.
    우리 아빠는 늘 엄마와 말다툼을 했다.
    엄마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왔다. 엄마는 말씀을 잘하시고,
    똑똑한 분이셨다. 당신 밥은 굶으면서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과 늘 나누셨다.
    광주리에 생선을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온 생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밥을 대접하고 그 많은 생선을 다 팔아주었다.
    그리고 아이스케키를 팔던 아이들의 아이스케키를 팔아주고,
    그 아이들에게도 밥을 해주었다. 엄마에게 밥은 사랑이었다.
    가마솥에 한가득 밥과 고구마를 쪄서 세 사는 사람들과도 나누셨다.
    심지어 우리 집 개구멍으로 들어 온 아이들에게도 밥을 나눠주었다.
    밥숟가락을 떠서 다른 사람에게는 잘 주었지만,
    정작 식구들은 밥이 부족했다.
    엄마는 부산에서 물건을 떼 와서 머리에 이고 성주에서 팔아 돈을 벌었다.
    엄마가 안 계시는 동안에는 동네 어르신이 우리 집을 봐줬다.
    동네 아줌마들이 고구마엿을 고아서
    엄마가 해준 떡에 발라먹었다.
    조갯골 동네잔치였다.
    그 다음날은 너무 힘들어서 학교도 못 갈 정도였다.
    떡 나르고, 떡국 끓이고,
    항아리에서 동치미를 꺼내야 하고,
    그릇을 내야 했다.
    엄마는 맏딸인 나를 믿었는지 몰라도
    끊임없이 나에게 일을 시켰다.
    그리고 밥 굶는 이들에게
    밥을 해주는 날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너무 힘들어서
    우는 날도 있었다.
    엄마 생각에 딸은 학교를 안 보내도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것이 한이 되어 나는 돈을 벌어
    동생들을 가르쳤다. 결혼 전, 엄마가 담뱃가게(슈퍼)를 크게 했다.
    이틀에 한 번씩 돼지를 잡아서 팔았는데, 그 모든 걸 내가 했다.
    동네 아줌마들은 나에게 ‘아씨’라고 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아씨’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 사람들을 만나면 나보고 ‘아씨’라고 부른다.
    성주 석재공장에 근무하던 당숙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엄마는 정직함을 아주 귀하게 여겼고,
    엄한 집안 분위기에 이끌려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다. 탄광에서 측량기사로 일했다.
    엄마하고 같이 살다가 엄마가 부산으로 물건을 떼러 간 사이에
    우리 부부는 분가를 했다. 내가 집안 모든 살림을 다 했기에
    부산에서 돌아 온 엄마는 기가 막혀했다.
    배움이란 무엇일까.
    나는 엄마에게 배운 대로 남편을 존중하며 살았다.
    아빠가 간암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혼자 열심히 사시던 엄마는 대천에서 동방상회(어물전)를 했다.
    그리고 엄마는 89세에 치매를 좀 앓았지만 늘 건강하셨다.
    그러다가 암이 발견이 되어 큰 병원으로 옮겼다.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네 밥숟가락을 보니까 건강해 보여서 동생들을 너에게 맡겨도 되겠다.”
    나는 어려서 몸이 약했다. 아는 스님 말씀에 내가 명이 짧다고,
    결혼을 빨리 시키거나 재취로 들어가야 명이 길어진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건강하게 밥숟가락 뜨는 것을 보면서 안심하는 것 같았다.
    생의 마지막을 함께 살던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돌아가셨다.
    시간이 지나 내 딸도 암으로 엄마 곁으로 갔다.
    내 밥숟가락을 생각했던 엄마에게 기도했는데,
    딸이 꿈에 와 말했다.
    “엄마만 행복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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