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스페셜 - 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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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14. 01. 2020
  • - 조선시대 서자, 실상을 엿보다
    조선시대 주리 성리학을 주창한 회재 이언적에게는 이응인과 이전인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전인은 이언적과 후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고 이응인은 5촌 조카로 이언적이 양자로 들인 아들이다.
    양자 이응인은 가문의 제사를 맡은 적자가 됐으나 이전인은 뛰어난학행과 효심에도 불구하고 회재의 대를 잇지 못했다. 서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서자들의 손발을 묶었던 태종은 고려시대 만연했던 병축(아내를 여럿 두는 풍습)을 금지하고 적첩을 철저히 구분했다.
    서자들의 과거시험을 제한하고 관직등용도 막았다. 이는 양반가 자제들에게 매우 가혹한 조치였다. 과거를 보지 못하고 관직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양반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 허통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선조 16년에 일어난 니탕개란. 당시 병조판서였던 율곡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했다. 전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치기는 했으나 이것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길을 열었다.
    서얼들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들끼리 마음을 합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 그 중의 하나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였는데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하여 왕이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힘을 모으고자 할 때 주로 상소를 올렸다.
    왕은 서얼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숙종을 거쳐 영정조 시대에 서얼허통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 서얼들의 도전, 200년에 걸친 향전
    조선시대 왕과 사대부는 끊임없이 대립했고 서자 문제도 그 중 하나였다.
    조선 초 태종은 본인의 뜻으로 서얼차대를 본격화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임금은 서자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허용하고자 하고 사대부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세력을 합해 더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영남 남인들은 노론에 밀려 중앙권력에서 밀리게 되자 지역 특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을 배척했다.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까지 역임한 이준은 관직에 관한 한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진입을 막았던 것이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사회에서는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붓을 들고 청원서를 쓴다. 그러나 그의 절절한 호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옥산서원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서얼과 지방 사족과의 장기간의 향전이 벌어졌다. 1884년 서얼들의 승리로 서얼소통이 되었고 이러한 옥산서원의 서얼소통은 당시 영남의 서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신역사스페셜 54회-독락당 어서각은 왜 굳게 닫혀 있었나. 조선 서자들의 500년 도전사 (2010.12.16.방송)
    history.kbs.co.kr/

Komentáře • 144

  • @user-wb3lw6gn4m
    @user-wb3lw6gn4m Před 4 lety +58

    임진왜란도 모자라서 일제 강점기까지 겪은 거 보면 정말 답 없는 나라였음. 그놈의 성리학..양반. 조선 500년 역사는 치욕이다.

  • @suhxehu27hwyxts96
    @suhxehu27hwyxts96 Před 4 lety +32

    학교에서 역사책 보고 셤보는것보다

  • @annazen1893
    @annazen1893 Před 3 lety +11

    저런시대에 태어나지않은게 천만다행

  • @weise2
    @weise2 Před 3 lety +33

    이 영상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 하나: 기득권을 가진 지배층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강화위해 사람(예:적자서자)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이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것.

  • @VitorJKhan
    @VitorJKhan Před rokem +5

    이 내용을 보니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 @gigicreater
    @gigicreater Před 3 lety +8

    여기서 '개혁'이라는게 무엇인지 알게된다. 바로 말도 안되는 짓을 하는 인간들을 바로 잡는다. 이게 바로 개혁이다.

  • @studenta6844
    @studenta6844 Před 4 lety +11

    영상 감사합니다.

  • @paul3046
    @paul3046 Před 4 lety +31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이유를 알겠다

  • @user-wk1do4sd7j
    @user-wk1do4sd7j Před 3 lety +28

    지도자의 잘못된 결정이 천하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는걸 이 사례가 보여준거지. 정도전에 대한 사적인 감정 때문에 수백년동안 많은 서얼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함.

  • @USA-TIGGER
    @USA-TIGGER Před 2 lety +9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3개월을 이동했다니 정말 대단한 효심입니다

  • @myungwonlee739
    @myungwonlee739 Před 4 lety +10

    내가하면 로맨스요

  • @sklee1789
    @sklee1789 Před 4 lety +15

    고려는 호족이 지배하는 지방분권제에 가까웠는데 조선시대는 중앙집권제라 지방의 권한이 없으니 상업등이 발전 할 수가 없었음. 농사를 중심으로 하면 신분제가 가장 심해짐...일본은 영주제(지방자치)라 상업괴 교류가 발전할수가 있었음...

  • @jsm9252
    @jsm9252 Před 3 lety +4

    조선시대 서자출신 임금

  • @tv-td8cp
    @tv-td8cp Před rokem +3

    참으로 존경스러운 성인이자 충신입니다. (육관 손석우의 제자 원각대사 봉 필락)

  • @doobu691
    @doobu691 Před 4 lety +2

    재미있다

  • @Luminary03
    @Luminary03 Před rokem +7

    서자나 얼자가 그 단어 자체에 그렇게 더럽고 천하고 폐륜적이라는.. 흉악한 뜻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 @milknomore1041
    @milknomore1041 Před 4 lety +14

    그러니까 양반입네 시고 온갖 첩질과 계집질에 따른 결과물...

  • @j.y.5276
    @j.y.5276 Před 3 lety +5

    저렇게 차별할거면 왜 애를 낳았고 피임도 안했지?

  • @mueller1690
    @mueller1690 Před 4 lety +4

    재밌게 잘봤습니다^^

  • @user-ox9ok4re7g
    @user-ox9ok4re7g Před 4 lety +5

    고려시대에는 가족관계 재산 분배가 더 공평했다고하던데 제사도 간편하고 .. 일본이 싫지만 조선이 쓸 떼없이 저런데 집착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