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저널 그날] 워털루 전투의 승부를 가른 결정적 이유ㅣKBS 220129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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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29. 01. 2022
  • [346회 그날 클립영상] 워털루 전투의 승부를 가른 결정적 이유
    #역사저널그날 346회 “신년기획 - 세계사를 바꾼 승부 ⑤ 나폴레옹 최후의 승부, 워털루 전투”
    자세한 방송 내용이 궁금하다면?
    KBS 공식 홈에서 #다시보기 ▶ bit.ly/2T6Td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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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 #웰링턴 #워털루전투

Komentáře • 23

  • @user-ik6fk3yg6l
    @user-ik6fk3yg6l Před 2 lety +4

    다른 모든 프랑스 부대를 항복을 했는데,
    나폴레옹 근위대는 이미 진 전투에서 항복을 거부하고 모두 죽음을 택했다.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 @huttulee
    @huttulee Před 2 lety

    오늘화 교수님 착한느낌의 윤제문 닮으셨는데 설명 잘해주셔서 좋네요🤭

  • @kcs8772
    @kcs8772 Před 2 lety +8

    영국군은 당시 유일하게 실탄으로 사격훈련을 할 정도의 화약도 풍부하고 부자군대였죠. 즉 제국근위대가 아무리 강해도 완전 유리한 지형의 디펜스포지션에서 당시로선 가장 막강한 화력세례를 퍼붓는 영국군의 일제사격은 감당하기가 불가능했을겁니다. 제국근위대는 사격도 금하고 오로지 총검만으로 사운다는 프라이드가 있을정도로 강하지만 뭐 빗발치는 총탄에 별수없죠. 그리고 애초 나폴레옹은 희망이 없었죠. 아마 본인도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실낱같은 희망에다 가만히 앉아 당할수는 없다고 생각한 고육책이죠. 프로이센군의 경우 사령관 블뤼허부터 나폴레옹을 잡아 사형시킬려고 벼르는 인물이니 사기도 낮은건 아니었구요. 나폴레옹에게 침략을 당한 러시아와 다른 유럽각국들도 사기에 있어서도 뭐..
    설령 워털루에서 이긴들 다가오는 남유럽부대, 오스트리아군, 러시아군에 또 일단 패배해도 다시 정비를 해서 다시 나올 유럽군들에게 어차피 나폴레옹의 패망은 피할수없는 운명이죠. 저는 그리고 분명 연합군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당연히충분히 연구하고 웰링턴처럼 대처방법을 찾은상태였다고 보거든요.

  • @bnojay7507
    @bnojay7507 Před rokem +6

    그루시는 어디있는거냐?

  • @user-dq6tf9ms6q
    @user-dq6tf9ms6q Před 7 měsíci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이베리아와 프랑스 남부에서 아작내고 파리로 진격하더니 나폴레옹 전쟁에 마침표까지 찍은 웰링턴 그야말로 천하무적인듯 ㅎㅎ

    • @user-px5pj2rg4l
      @user-px5pj2rg4l Před měsícem

      웰링턴의 고뇌도 있고 운도 따르고
      용병술이 좋았음
      웰링턴 부대중 전투경험 없는 부대가
      상당했음 네덜란드군도 있었음
      블뤼허의 프러시아군 빼면 육만팔천
      프랑스군 오만오천에서 육만사이
      그로시가 삼분지일 못데리고옴
      여러운이 겹치고 본인의 용병술이
      잘 믹스된 전투

  • @VHG-yn3xp
    @VHG-yn3xp Před 8 měsíci +2

    비로 개전시간을 뒤로미루었다고 생각하시지만(포와 말의 기동) 웰링턴의 군대 대부분은 능선뒤에 있었기에 거의 포에 피해를 보지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로이센군의 등장은 그루시(우익 지휘관)의 잘못된 추격으로 나타난것이며 참모장인 술트장군이 전령을 1명을 보낸것도 전투에서 진 이유가있습니다.
    원래부터 같이 생활했던 참모장 베르티에의 부재(나폴레옹의 호출을 받고 창문에서 뛰어내림)로 술트장군을 참모로 임명했지만
    웰링턴과 이베리아에서 싸워본 경험이있는 술트장군을 좌익으로 보냈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루시장군은 기병부대를 지휘하는것은 (뮈라가 가장 뛰어난 기병장군이지만 그루시도 기병부대 지휘로는 뛰어났다.) 뛰어났지만
    경험이없는 전체군을 지휘하는 우익지휘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네 장군이 중앙에 구멍을 만들었지만 예비대가 없어 나폴레옹에게 근위대를 요청했지만
    나폴레옹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으며 웰링턴이 양쪽에 예비대를 중앙으로 투입한 후에 가서야 나폴레옹이 근위대를 투입하였습니다.
    그것도 선임근위대가 아닌 중견근위대로 말이죠. 나폴레옹은 전투를 아니 전쟁을 시작하기전부터 이미 진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뮈라원수를 같이 데리고갔거나 참모장을 다른사람으로 바꾸고, 네 장군,그루시,술트장군들을 적절히 섞었다면 워털루전투가 일어나기도 전에 끝났을수도있습니다. (리니전투에서 데를롱의 군단이 시간에 맞추어 장소에 도착할것을 카트라 브라에서 네 장군이 소환하여 리니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궤멸하지못하였으며, 추격이라 하기에도 부끄럽게 한참뒤에 추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카트라브라에 술트 or 그루시 장군이 있었다면 신중하게 전투를 하였을것이며 그다음날 아침에 전투를 다시 시작하였다면 연합군을 포위할수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리니전투를 끝내고
    합류하고있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네 장군의 부대는 그시간에 밥을 먹고있었으며 나폴레옹은 분노를 참지못하고 지휘관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네 장군의 대규모 기병돌격은 여러추측이 있지만 네 장군이 소규모 기병돌격을 명령하였지만 중기병들이 명령을 기다리지못하고 앞에 부대들이 움직이는것을보고 다같이 움직였습니다. 기록에도 이렇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규모 기병돌격후에 다시 적절한 공격으로 주도권을 가져올수있었으며 무조건 네 장군의 기병돌격이 워털루전투의 패배요인으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기병들은 포대로 갔지만 포대를 막을 망치와 못이 없었기에 다시돌아왔다는 기록도있습니다.)

    • @user-px5pj2rg4l
      @user-px5pj2rg4l Před měsícem +1

      병력이 모자라서 투입했다가
      전선고착되면 더빠른 패배가 됬을수도 그루시의 부대가 묶여
      있어 못온게 불운의 시작

  • @langouste6544
    @langouste6544 Před 2 lety +7

    나폴레옹은 워털루에서 패했지만, 역사라는 기억의 무대에서는 최후의 승자이죠.
    워털루 이후 100년 간 유럽사는 제2의 나폴레옹을 막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그를 막고자 했던 전유럽의 전제군주들, 그를 꺾은 웰링턴과 블뤼허는 잊혀지더라도 그가 역사에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 @user-ht3jz8kj
      @user-ht3jz8kj Před rokem +2

      더 위대한 사람이 있습니다 칭기즈칸

  • @user-ob8bi9pi8o
    @user-ob8bi9pi8o Před 10 měsíci

    마치, 상방곡에서 사마의를 궤멸할뻔한 제갈량의 전술이, 결국 비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는데..결국 패권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안되는구나.

  • @user-qk2qu2ql6e
    @user-qk2qu2ql6e Před rokem +2

    우천취소?

  • @user-px5pj2rg4l
    @user-px5pj2rg4l Před měsícem

    그랑드 아르메의 몰락
    비운의 코르시카 풍운아

  • @kriskwon575
    @kriskwon575 Před 7 měsíci

    결국 프로이션의 블뤼어냐 아니면 이를 추격하는 그루쉬냐가 승패의 요소네요? 오전에 비가왔냐? 네이원수의 무모한 기병돌격이냐? 마지막으로 근위대의 공격의 실패냐는 부분적인 전술이지만 3-4만에 달하는 블뤼어부대의 회귀는 뒤집기 어려운 결정적사안이지 않았나요?
    나폴레옹은 블뤄어를 추격하는 그루쉬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면서 필요시 추격을 멈추고 그를 본대로 불러드려야 하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을까? 이래서 통신과 소통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블뤄어와 그루시의 위치를 파악했어야 하는데. . . 만약 그가 평생고생하는 복통이 없었고 총기가 살아있었다면 이를 그렇게 소홀하게 대처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 이게 작은 실수가 아니라 결정적인 패전이 원인으로 나폴레옹의 실책입니다.

  • @user-zl4dz6ts5j
    @user-zl4dz6ts5j Před 2 lety +2

    근본적인 원인은 프랑스군의 질적저하이죠.

    • @user-sg8dp8ql9v
      @user-sg8dp8ql9v Před 10 měsíci

      그래도 두나라의 군대와 비등비등하게 싸운게 대단

    • @VHG-yn3xp
      @VHG-yn3xp Před měsícem

      분명 질적저하도 이유겠지만
      그래도 나폴레옹이 파리로돌아오고 징집하였을때
      전쟁경험이 있던 자들이 자진입대를하였습니다.
      전문가들은 1812년 전성기시절때보단 못하지만
      그전에 1805년정도의 질적수준이라고 보고있습니다. 물론 질적수준이 승패에 영향을 준것은 분명하고 탈영과 징집 기피자가 100만명은 족히넘었고 참모장의 연락병 1명은 엄청난 재앙이었죠.

    • @user-zl4dz6ts5j
      @user-zl4dz6ts5j Před měsícem

      @@VHG-yn3xp프랑스군은 1805년~1807년이 전성기이고 그 이후에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 @VHG-yn3xp
      @VHG-yn3xp Před měsícem

      @@user-zl4dz6ts5j 앗 제가 말한 전성기는 군대의 전성기입니다 ㅎㅎ (수적 질적)

  • @ruby9279
    @ruby9279 Před 7 měsíci

    나폴레옹하고 징기스칸하고 데스매치한적없음??징기스칸이 나폴레옹에게 발렸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