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백강ㅣ낙랑군 위치에 대한 문헌중심 고찰로 논란을 종결한다ㅣSTB상생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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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16.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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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mentáře • 63

  • @user-vj5hx2sj3z
    @user-vj5hx2sj3z Před rokem +12

    지금 우리 사학계는
    (1) 강단사학의 반도중심사관
    (2) 재야사학의 만주중심사관
    (3) 심백강 박사님을 위시한 일부 재야사학계
    의 하북성 중심사관.
    (4) 최근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산동
    성 및 하북성 중심사관들로
    나뉘어져 있는 듯 합니다.
    재야사학의 논조를 통일하기 위하여 정기적
    인 세미나 개최 및 사전 주제 설정을 통하여
    논의하는 모임이 중요시 됩니다.
    서로간의 주장하는 논조를 심층검토하고 비
    교하여 통일된 논리를 제공하는 자리가 무엇
    보다도 중요시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를 바탕하여 국사교과서를 바꾸는 작업을
    함께 진행하여 나가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 @vivekakim
    @vivekakim Před 7 měsíci +3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강력 추천합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강의는 계속 되어야합니다!
    멋진 겅의 감사합니다!

  • @user-cu8er1nj6q
    @user-cu8er1nj6q Před rokem +5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세우고 국혼을 되찾아야 진정한 선진 대한민국이 된다. 심백강 박사님의 명강의 잘 들었습니다.

  • @user-vr1bc7fx8g
    @user-vr1bc7fx8g Před 11 měsíci +4

    민족의 맥을 찾아 주시는점에
    감사드립니다

  • @user-ow1po6mb5t
    @user-ow1po6mb5t Před 2 lety +7

    반도사관을 벗어나야 역사가 바로 섭니다. 시야를 넓혀 역사의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

  • @gn.l3762
    @gn.l3762 Před 2 lety +11

    수경주ㆍ태강지리지 등을 참고 해볼때 현 갈석산 서쪽의 난하가 요수가 되고 당산시 일대가 낙랑군이 됩니다.ㅡ 그러나 만리장성의 전체 모양 으로 볼때는 태행산맥 북단의 백석산에서 시작한 장성은 연산산에 접하고 다시 연산산에서 길게 서쪽으로 감숙성까지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장성의 동쪽끝 연산산이 고대 갈석산이라는 심증이 갑니다. 그리고 조백하가 요수가 되고 베이징일대가 낙랑군이 되는 것입니다.

    • @user-di9zq6wq3m
      @user-di9zq6wq3m Před 2 lety +2

      최근에 낙랑군이 이곳이다 (북경지역)
      결정적인 고고학적인 묘비도 발견되었음 빼도박지도 못하는 증거물

    • @gn.l3762
      @gn.l3762 Před 2 lety +3

      @@user-di9zq6wq3m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처음들어 보는 말씀인데요.? ㅡ 고대의 갈석산이 어디인지 확인이된다면 고대사를 보는 눈이 달라질것이라 생각됩니다. 재야사학계의 현 갈석산 그리고 일부학계의 태행산맥 북단의 백석산으로 나뉘는데 저는 만리장성의 전체 형태로 볼때 고대의 갈석산은 연산산이며 이 연산산은 본래 산서성 태원의 연경산의 산명이 옮겨진 것이라 봅니다. 다시 말해 춘추전국시기 연나라 계성 즉 연경이 바로 태원에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중국의 역사가 고힐강은 주나라 강역이 커지자 연나라가 하남성에서 분수유역으로 옮겨왔다 했으니 산서성 태원은 고대 연경이었다는 거죠.? 따라서 현 베이징이 고대의 위만조선의 중심지 험독 별칭 평양이었고 뒤에 낙랑군의 땅이며 태고의 고죽국이라고 봅니다.

    • @gn.l3762
      @gn.l3762 Před 2 lety +2

      진시황본기 26년 서기전 221년 진나라가 6국을 합병하고 진의 영역을 동쪽으로 바다에 닿고 조선에 접하며 북쪽으로 오르도스 북쪽의 황해를 요새로 삼아 음산을 따라 요동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 @jongil1111
    @jongil1111 Před 2 lety +9

    심백강 박사님 강의 듣고 "사고전서 사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 사서 읽고 있습니다. 눈을 틔워 주셔셔 감사합니다.

  • @youngjoon88
    @youngjoon88 Před rokem +3

    심백강 선생의 멋진 우리 고조선-부여-고구려 등의 고대사 강의에 캐나다 교민도 박수를 보냅니다.
    이런 제대로 된 선각자 선생이 역사의 중심에 서야만 하는데..... 한국의 기존 강단사학-식민사학을 타파해야만!!
    심백강 선생의 건투를 빕니다. 항상 건강하시어 동북공정의 중공의 예봉을 꺾고 일제 식민사관을 타파해 주시길 바랍니다.

  • @user-vy1pw8ns3b
    @user-vy1pw8ns3b Před 2 lety +9

    요동과 요서의 기준점인 태행산(맥)이 갈석산과 고대의 음과 뜻이 같습니다.
    태太는 크다이고, 행行의 상고음이 '가라>갈' 입니다. 가라>갈은 높다(高)의 뜻으로 태행산는 크고 높은산의 의미 입니다.
    갈석碣石의 갈碣은 '가라'가 음이고 높다(高, 大)이며 석石 또한 고대음이 '다라>달'로서 크다(大)의 우리말 입니다. 즉 갈석산도 크고, 높은산 입니다.
    음성적으로는 둘은 같은 산 입니다.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대명사의 대부분은 음차문자 입니다.

    • @sungchunchoi4817
      @sungchunchoi4817 Před 4 měsíci

      사서에 나오는 갈석산, 즉 낙랑군과 관련된 갈석산은 조조가 올라 관창해를 지은 곳이기도 합니다. 낙양에서 걸어서 올라갔다는 기록을 볼때 낙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되겠지요. 그리고 패수는 수경, 수경주에 기록되어 맀는데 수경과 수경주는 하수(황하), 회수, 강수(양자강)의 본류와 지류에 대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강의 흐름 방향을 떠나 대릉하나 난하 등은 위의 세 강과 관련이 없으므로 패수의 후보가 될 수 없습니다.

  • @user-yg7ed5hr9l
    @user-yg7ed5hr9l Před 2 lety +4

    👏🏼👏🏼👏🏼👏🏼👏🏼👏🏼👏🏼

  • @gn.l3762
    @gn.l3762 Před 2 lety +4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도 잊어서는 안됩니다.ㅡ 우리는 한4군만 말하는데 연5군(실제는 진5군으로 추정)도 고조선 영토입니다.ㅡ 연5군을 상실한 다음 한4군을 상실한것입니다.?

    • @gn.l3762
      @gn.l3762 Před 2 lety +2

      진시황은 6국을 합병한 이후 동쪽 국경을 바다에 닿고 조선과 접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쪽은 오르도스 북쪽의 황하에서 음산을 따라 요동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이는 현 만리장성이 연산산에 닿은것과 같습니다.ㅡ 요동의 갈석산은 지금의 연산산입니다.

    • @user-nu4cz2lv8g
      @user-nu4cz2lv8g Před rokem

      ㄷ6ㄷ96
      6

  • @Alnilam707
    @Alnilam707 Před 2 měsíci

    원통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웁시다!!

  • @hanhan4980
    @hanhan4980 Před 3 měsíci

    위치 선생남 말씀이 맞씀니다 동북공정하는 한국교과서

  • @user-qw7bm9rh7p
    @user-qw7bm9rh7p Před 2 lety +7

    결국 중원 땅이 저희 선조님들의 강역 이군요

    • @user-ph8bq4tc6u
      @user-ph8bq4tc6u Před 2 lety +1

      오죽 못났으면 그 너른 땅 다뺏기고 반도로 쫓겨나서 그나마도 반토막이노 ㅋㅋ

  • @hanhan4980
    @hanhan4980 Před 3 měsíci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의 천리관성 베이징 북쪽에 돌로 만든 높이 7.5미터 (3층 높이 정도) 폭이 7.5 미터 길이 250 키로 바닥면적 약 8만 제곱미터 정도로 명나라 이전에 축성
    역사는 상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이 거대한 석성 흔적이 있는곳은 만리장성 뿐 입니다 다른곳에있으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른 의견도 부탁드립니다
    명사 ==명나라 1년ㅡ안문관(類文關)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보안주(寶庵縣)는 ㅡㅡㅡ거용관을 거쳐 북평을 공격했다.
    고려사 ==지리서문==우리역사 최대영토=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하공진(河拱辰)을ㅡㅡ₩₩ 안문(鴈門)에 파견하여₩₩ 압록(鴨綠)에서 구당사(勾當使)가 되도록 하고, 낮에는 나가서 동쪽 강변을 감시하고 밤에는 내성(內城)으로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고려사==〈덕종(德宗)〉 2년(1033)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방 경계에 처음으로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해 바닷가의 옛 국내성(國內城)의 경계로서 압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는 위원(威遠)·흥화(興化)·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寧德)·영삭(寧朔)·운주(雲州)·안수(安水)·청새(淸塞)·평로(平虜)·영원(寧遠)·정융(定戎)·맹주(孟州)·삭주(朔州) 등의 13개 성(城)을 거쳐 요덕(耀德)·정변(靜邊)·화주(和州) 등의 세 성(城)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니, ㅡㅡㅡㅡ₩₩길이가 1,000여 리에 뻗었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ㅡㅡ₩₩ 높이와 두께가 각 25척(尺)이다.
    고려사==〈정종(靖宗)〉 7년(1041)에 최충(崔冲)이 영원(寧遠)·평로(平虜) 두 진(鎭)에 성(城)을 쌓았다. 영원성(寧遠城)은 759칸이고, 보자(堡子)는 8곳으로, 구내(區內)의 금강수(金剛戍)는 42칸, 선위수(宣威戍)는 61칸, 선덕수(宣德戍)는 50칸, 장평수(長平戍)는 53칸, 정잠수(鼎岑戍)는 38칸, 진하수(鎭河戍)는 42칸, 철용수(鐵墉戍)는 61칸, 정안수(定安戍)는 32칸, 관성(關城)은 11,700칸이다. 평로성(平虜城)은 582칸이고, 보자는 6곳인데, 구내의 도융수(檮戎戍)는 36칸, 진흉수(鎭兇戍)는 30칸, 직잠수(直岑戍)는 41칸, 항마수(降魔戍)는 50칸, 절충수(折衝戍)는 30칸, 정융수(靜戎戍)는 30칸이고, 관성(關城)은 14,495칸이다.--ㅡㅡ좀 더 자세히 유튜브 만들어서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요 만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려사==유소(柳韶)는 사서(史書)에서 그 세계(世系)를 잃어버렸다. 현종(顯宗) 때에 사헌중승 간의대부(司憲中丞 諫議大夫)를 거쳐, 여러 차례 승진하여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현종〉 20년(1029)에 왕은 유소에게 명령하여 흥화진(興化鎭) 서북쪽 40리에 있는 오래된 석성(石城)을 수리하여 위원진(威遠鎭)을 설치하게 하였다. 또한 흥화진 북쪽에 있는 오래된 석보(石堡)를 수리하여 정융진(定戎鎭)을 설치하게 하고, 영평진(永平鎭)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게 하였다.
    거란(契丹)의 동경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칭 흥요국(興遼國)이라하며 원군을 요청하려 왔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유소는 서북면(西北面) 판병마사(判兵馬使)로 있다가 상을 당하였는데, 왕이 교서를 내려 기복(起復)하라며 이르기를, “옛날에는 3년상에도 졸곡(卒哭)이 지나면 전란[金革之事]을 회피하지 않았다. 한(漢) 승상(丞相) 적방진(翟方進)이 상을 당하였는데, 장사지내고 난 뒤 30일 만에 상복을 벗고 일을 보았다. 지금 흥요국에서 원군을 요청해 왔으니, 변방에 변고가 생길까 걱정이다. 경은 변방으로 속히 가서 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중군병마원수(中軍兵馬元帥)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로 옮겼다. 〈덕종〉 2년(1033), 유소가 처음 북쪽 국경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서쪽 해변의 옛 국내성(國內城) 지역으로부터 압강(鴨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세웠는데, 동쪽으로 위원진·흥화진·정주(靜州)·영해(寧海)·영덕진(寧德鎭)·영삭진(寧朔鎭)·운주(雲州)·안수진(安水鎭)·청새진(淸塞鎭)·평로진(平虜鎭)·영원진(寧遠鎭)·정융진(定戎鎭)·맹주(孟州)·삭주(朔州) 등 13개의 성을 넘어, 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화주(和州) 등 3개의 성에 이르렀다. 이 공사 중에 거란이 와서 분쟁을 일으키자, 교위(校尉) 변유(邊柔)가 기세를 떨치며 앞장서 공격해 물리쳤으며, 그 전공으로 중랑장(中郞將)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 왕이 신하들을 위해 문덕전(文德殿)에서 잔치를 베풀어 유소 등이 국경의 관성을 개척한 일을 치하하였고, 유소에게는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은청흥록대부 상주국(銀靑興祿大夫 上柱國)으로 품계를 올렸고, 벼슬은 태위 문하시랑평장사(太尉 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시호를 양의(襄懿)라 하였으며, 덕종 묘정에 배향하였다.
    고려사==〈성종〉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냈고,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이듬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흥화진(興化鎭)에 성을 쌓았고, 또 그 이듬해 선주(宣州)·맹주(孟州)에 성을 쌓았다
    명사== 명나라 1년 ㅡㅡ원년 12월 1일 3번째 기사 / ○ 서다케 장군이 태원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티무르는 밤에 도망쳐 백성들에게 항복했는데...원래 국국제(國國臣)는 밤에 도망쳐 항복했는데, 원나라의 모든 통치자들이 북쪽으로 돌진하여 고국제국(高國皇師)에게 북평으로 돌아가라고 명했는데, 그가 군대를 이끌고 ㅡㅡㅡ₩₩안문관(類文關)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보안주(寶庵縣)는 ㅡㅡㅡ₩₩거용관을 거쳐 북평을 공격했다. 대원이 이 말을 듣고 장수들은ㅡㅡㅡ명나라 이전에 축성 근거 그러면 고려가
    중국의 장성공정(長城工程)
    한국민족연구원
    nationsworld.kr › cncho › paper › 52-N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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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과 민족, 장성과 건축학과의 관계 등 장성과 ... 번해지고 강력해지자 명나라는₩₩ 관성과 보 · 영 사이에 종래보다 훨씬 높고 견고한 연결된 일 ... 과 요동변장과는 큰 차이
    원사 ㅡㅡㅡ₩₩₩₩ 한반도에서 가는할까요 ㅡ고려가 원나라를 먹여 살려요
    1289년 04월 01일 (음)
    요양성(遼陽省) 관내에 기근이 들어, 고려(高麗)에서 쌀 60,000석을 빌려 그를 진휼

  • @sungchunchoi4817
    @sungchunchoi4817 Před 4 měsíci

    선생님! 노룡현과 창려현도 위치가 왜곡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 지도의 노룡과 창려는 훨씬 더 서쪽에 있었습니다.

  • @JP-tf2ze
    @JP-tf2ze Před 2 lety +2

    호타하 근처가 연의 남쪽국경이면 조선과는 북경넘어 일대어디에서 맞되는게 보다 합리적인 추론 같은데 백석산이면 호타하에서 백석산까지 거리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연나라 영토가 확보가 안될듯~

    • @user-ph8bq4tc6u
      @user-ph8bq4tc6u Před 2 lety +1

      연나라 뿐 아니라 유 청 기 병 하북 4주 군현들이 들어갈 자리가 다 없어짐.

    • @davekim7777
      @davekim7777 Před 2 lety

      축소판으로 설명하면 지리산이 갈석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산이고, 섬진강이 호타하라는 얘기잖아. 대구가 북경 정도 위치되는거고.
      충남 경기도까지가 연나라. 그 동쪽땅 경상도 충청북도 강원도는 고조선땅.

    • @davekim7777
      @davekim7777 Před 2 lety

      연라라는 2천리. 남북으로 길고 동서는 좁고.

    • @user-kt2ep3lt1q
      @user-kt2ep3lt1q Před rokem +1

      燕은 偃으로 훨씬 남쪽에서 출발해 점차 이동해 올라갑니다. 저는 심 박사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 @user-do3cn3pr6v
    @user-do3cn3pr6v Před měsícem

    서울대, 연고대 및 전국 대학 강단사학 교수들은 심백강 교수을 찾아와서 무릎꿇고 진짜 역사를 배워야 한다.

  • @syjo8315
    @syjo8315 Před měsícem

    저는 한사군 한반도내 위치설의 허구를 말할 때, 그러면 왜 반도내 영토수복 전쟁이나 철수의 기록이 하나도 없는가를 묻습니다.

  • @user-oi8ie3wp5k
    @user-oi8ie3wp5k Před 2 lety +4

    낙랑군 위치는 현재 하북성(진황도시 당산시 천진시 보정시 등) 일대를 말한다
    전한서 : 한무제가 하북성 갈석산을 지나 현도 낙랑을 군으로 삼았다
    태강지리지 :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의 기점이다
    태강지리지에 언급된 수성현은 현재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 수성진이고,
    갈석산은 현 보정시(옛 낙랑군 지역)의 백석산이 과거에 갈석산이라 함
    우리가 알고 있는 현 갈석산은 원래 게석산이라 하였다
    만리장성은 진나라가 기존의 천리장성을 연결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다
    현존의 산해관에서 부터 북경까지 쌓은 장성은 명나라 주원장이 쌓은 명장성이다
    즉 현재의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기점이 아니다.
    간단하게 개념 잡기 위해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심백강 소장님의 주장에 반론이 제기할 수 있는 역사학자가 과연 있을까요
    있다면 피튀기는 토론 부탁드립니다

    • @user-ph8bq4tc6u
      @user-ph8bq4tc6u Před 2 lety

      애초에 진서 태강지리지 자체가 당나라때 기록으로, 당나라 당시 지명을 기준으로 쓴것임.
      심씨의 주장은 이 단순명료한 팩트 한방에 허물어지는 괴설에 불과.
      게다가 원래 한무제의 낙랑군은 갈석산 옆에 있지도 않았음. 고구려 미천왕에게 작살나고 옮겨온 곳이 갈석산 옆 장성 끄트머리임.

    • @user-ph8bq4tc6u
      @user-ph8bq4tc6u Před 2 lety

      미천왕이 낙랑 대방 현토군과 요동군 서안평현을 작살내서 고구려 땅으로 삼았고, 그래서 원래는 국경지대였던 요하유역이 거의 온전히 고구려 땅이 돼서, 고국원왕이 국내성과 평양성을 쌓았고, 이 두 성이 나중에 장수왕의 평양천도 후 남쪽의 한성과 함께 고구려 3경이 된다.
      그래서 수양제 당태종은 고구려 땅이 원래 중국의 군현이라며 전쟁명분을 삼았고, 요사 금사 원사 지리지는 하나같이 낙랑군=장수왕 평양성=요나라 동경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낙랑군이 북경 서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요사 금사 원사 지리지부터 반박해라.
      강단주류들처럼 '응 그거 두찬' ㅇㅈㄹ 하겠지? ㅋㅋ

    • @sungchunchoi4817
      @sungchunchoi4817 Před 4 měsíci

      패수는 수경에 나옵니다. 수경에 자세한 각주를 붙인것이 수경주입니다. 수경과 수경주는 하수(황하), 회수, 강수(양자강)의 본류와 지류에 대한 기록입니다. 수경주의 1권~5권은 황하의 본류, 6권~29권 황하의 지류에 대해 기록하였고 패수는 14권에 나옵니다. 따라서 패수는 황하의 지류가 됩니다. 난하, 대릉하 등은 황하와 관련이 없으므로 패수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지금의 산해관 근처에 있는 갈석산, 백이숙제묘, 노룡현, 창려현 등은 모두 지명 이동된 곳입니다.

  • @youngk4175
    @youngk4175 Před 9 měsíci

    "조선은 발해를 앉고 있다" 라고 아주 쉽게 규원사화에 나와 있었는데 우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발해를 낀 고조선은 이미 수많은 농업, 무기와 산업이 발전한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것은 화폐와 함께 장신구와 토기등이 발달한 상고의 무역국가 였습니다.

  • @user-ht5mk9vj7m
    @user-ht5mk9vj7m Před 7 měsíci

    낙랑군은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고조선은 원래부터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만주나 한반도는 본류가 아닌 지류

  • @user-nk6my1ns3y
    @user-nk6my1ns3y Před 4 měsíci

    하북성에서 평양에 오는데 왜 백두산을 지나야 하나?
    하북성에 있는 갈석을 지나지 않고 평양에 올 수 있나?
    후한서에는 갈석이라고 했는데 왜 자꾸 갈석산이라고 원문에 없는 산을 덧붙이나?
    하북성에 갈석이 있고 요녕성에 현도가 있고 평양에 낙랑군이 있으면 되지 않나?
    갈석산에 장성이 있나? 그것부터 확인해라. 갈석산은 한서 지리지에 요서군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 @user-vt1lq6wi9f
    @user-vt1lq6wi9f Před rokem

    김부식 - 이병도
    신채호 - 김용옥
    이렇게 두 역사관이 있습니다 ..
    정사는 단재 신채호 선샛의 사관입니다

    • @user-ke6sx8ne6b
      @user-ke6sx8ne6b Před rokem +3

      까까중과 연결하는 것은 신채호 이름에 먹칠하는 것.

  • @user-vm7wh4vt1l
    @user-vm7wh4vt1l Před rokem +1

    식민사관도 위험하지만, 중국 사서 한줄 가지고 저런식으로 호도하는 것도 큰 문제,,,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알고 싶을 뿐 입니다.

    • @user-ke6sx8ne6b
      @user-ke6sx8ne6b Před rokem

      유물도 있대.

    • @user-iz2wc4ci6m
      @user-iz2wc4ci6m Před 5 měsíci

      중국 사서 한줄 가지고 얘기한다니 개그하시지 말고 가서 심백강 교수님 다른 영상 더 보고나서 그런 소리하셔요.

    • @sungchunchoi4817
      @sungchunchoi4817 Před 4 měsíci

      중국의 사서기록 한 줄이 아니라 중국의 정사라고 하는 25사 기록을 교차검증하면 답이 나옵니다. 공부하시면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아실겁니다. 공부를 하시면 답이 보입니다.

  • @youngk4175
    @youngk4175 Před 9 měsíci

    역사의 기준은 낙랑설이 됩니다. 그만 큼 낙랑군의 위치는 우리역사의 지도의 중심입니다.

  • @user-zb3st2dd2f
    @user-zb3st2dd2f Před 2 lety +1

    동이한국사의 저자 이기훈씨도 심박사의 학설과 동일하게 주장

    • @user-ph8bq4tc6u
      @user-ph8bq4tc6u Před 2 lety

      그사람은 대동강 평양에 있었다고 하던데? 뭘본거야

    • @user-kl7uy6op4q
      @user-kl7uy6op4q Před rokem

      대뚱 옆의 강이 대동강입니다.

  • @user-ph8bq4tc6u
    @user-ph8bq4tc6u Před 2 lety +1

    애초에 진서 태강지리지 자체가 당나라때 기록으로, 당나라 당시 지명을 기준으로 쓴것임.
    심씨의 주장은 이 단순명료한 팩트 한방에 허물어지는 괴설에 불과.
    게다가 원래 한무제의 낙랑군은 갈석산 옆에 있지도 않았음. 고구려 미천왕에게 작살나고 옮겨온 곳이 갈석산 옆 장성 끄트머리임.

  • @user-nd1cy7hf7i
    @user-nd1cy7hf7i Před 10 měsíci

    이런분을 교육부 장관으로 모셔야 됩니다
    아니 더높은 대통령으로 모셔서 우리 잃어버린 역사 그리고 민족 영토와 자긍심을 후세에 물려줍시다.

  • @user-rd7ws5on8m
    @user-rd7ws5on8m Před měsícem

    시진핑의 역사왜곡하는 동북공정을 깨트려 버려야 한다, 일본의 식민사관을 없애고 정부는 충분한 예산을 책정해서 우리의 역사를 총정리하여 국민들에게 가르쳐야한다, 시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