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가요의 역사 - 가왕열전 3편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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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3. 07. 2024
  • 1919~2002년. 부산 출생.
    1938년 고등보통학교 졸업 이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음악학교(우에노음악학교) 중퇴로 알려져 있음.
    1940년대 초 일본에서 먼저 무대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국내 무대 데뷔는 1944년 성보악극단으로 추정.
    1. ‘해방 가수’ 제1호?: 신라의 달밤(1949년)
    중국에서 해방을 맞아 1946년 봄에 톈진에서 귀국선을 타고 돌아옴. 귀국 이후 다시 무대 활동
    음반은 1949년 신라의 달밤이 데뷔작
    2. 전무후무한 데뷔 1년의 성과: 비 내리는 고모령(1949년)
    대표작 절반 가까이를 1949~50년 럭키레코드에서 발매
    작품 대부분을 유호, 박시춘과 함께
    3. 영화와 인연: 푸른 언덕(1958년)
    최초(?)의 음악영화 푸른 언덕 주연
    성벽을 뚫고, 내 사랑 그대에게, 사랑은 흘러가도 등에도 출연. 1950년대에 영화 주제가 음반을 가장 많이 발표한 가수
    4. 전우야 잘 자라가 현인 노래?: 전우야 잘 자라(1967년)
    1950년 10월쯤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우야 잘 자라를 무대에서 처음 부르기로 한 가수는 남인수였다고
    현인이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전우야 잘 자라를 녹음했다는 설이 있으나, 물증이 없음. 현재 확인되는 전우야 잘 자라 최초 녹음이 현인 노래인 것은 맞지만, 시점은 1967년
    5. 새로운 대중음악 장르의 선구: 꿈속의 사랑(1956년. 원곡도 잠깐 들어 볼까요?)
    도쿄에서 공부, 상하이에서 활동이라는 이색적인 배경 덕에 대중음악의 국제적 흐름에 가장 익숙했던 가수
    스탠더드 팝, 샹송, 라틴 리듬 등이 1950년대 한국 대중가요에 정착하는 데 중요한 기여
    6. 새로운 창법의 전범: 서울 야곡(1950년)
    남인수와 백년설 계열로 대비되던 남성 가수 가창 스타일에 또 하나 흐름을 형성
    신세영, 박경원, 안다성, 도미, 윤일로 등 현인 스타일 가수들이 대거 등장
    7. 예명 문제
    현동주가 예명 현인을 사용하기 전 무대 가수 시절에 後藤仁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황문평의 주장
    하지만 1944년 성보악극단 광고에 등장하는 이름은 武原ひろ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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