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의 비극, 만슈타인에겐 책임이 없었을까? | 2차대전 주요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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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čas přidán 27. 08. 2024

Komentáře • 175

  • @pixvod
    @pixvod Před rokem +47

    2차 대전 당시 독일군 장성들이 천재였다고 극찬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전술을 짰는지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는 드물더군요. 이번 편에서 만슈타인 장군은 적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해내는 뛰어난 혜안을 가진 인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공할 작전도 말아먹는 히틀러의 천부적인 재능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독일은 애초에 이기지 못할 전쟁을 벌였다", "독일 무기가 연합군 것보다 뒤떨어져서 패배한 것이다" 라며 1차원적인 판단을 멋대로 내리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항상 유익한 컨텐츠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8

      제 컨텐츠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이번 컨텐츠도 보시게 된다면 다른 컨텐츠와는 다르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 @user-uj3mw4zg8h
      @user-uj3mw4zg8h Před rokem +8

      그야 그걸 하나하나 다 설명하기엔 관심없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걸 다 설명하면 다큐지 이전에도 꾀 있었는데 잘 알려지질 않아서 아쉬움

    • @user-gw2zu5do2r
      @user-gw2zu5do2r Před rokem +2

      제2차 세계대전은 기본적으로 물량을 바탕으로 한 소모전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독일 등 추축국의 군대가 아무리 작전을 잘 짜서 실행했어도 추축국이 승전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독일군이 실수를 적게 하고 운이 더 좋았다면 모스크바를 점령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독일이 승전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미국, 소련, 중국 등의 인구, 병력 수, 에너지자원(석유 등) 등을 고려하면 추축국이 처음부터 패배가 예정된 전쟁을 시작한 건 사실이죠.

    • @user-un2le9od5h
      @user-un2le9od5h Před rokem +1

      @테스트 소련군부도 독일의 소련침공을 25년이후로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독일이 침공안했으면 소련이 먼저 침공했을지도 모르죠. 어차피 서로 전쟁할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

    • @user-un2le9od5h
      @user-un2le9od5h Před rokem +1

      원유 철광석 공업생산력에서 압도적이었던 미국의 지원으로 44년초 3개월도 안되어서 독일공군이 소멸한걸 보면 이기지 못할 전쟁을 벌인건 맞는것 같습니다.

  • @rlee4805
    @rlee4805 Před rokem +6

    영상과 탁월한 해설
    늘 감사합니다
    덕분에 타임라이프의
    2차대전사 다시 독서든...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감사합니다.
      영상을 보시면 아셨겠지만 만슈타인의은 결단하는데 있어 전혀 망설임 자체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36 을 보면 만슈타인은 소련군이 옆구리를 칠 것 같으니까 지체 없이 후퇴명령을 내렸던 겁니다.
      그래놓고도 파울루스와 어찌할 것인지 막판 논의를 한 것은 만슈타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보여줍니다.

  • @user-tg2tn3ww3i
    @user-tg2tn3ww3i Před rokem +6

    ``6군이 포위된 상태에서 2달 반을 버틴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추위와 배고픔을 무릅쓰고...강제적인 규율로서가 아닌 싸우고자 신념이 내면화돼 있지 않았다면...

  • @user-jjy1015
    @user-jjy1015 Před rokem +5

    15:28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던 독일군들이 전멸 직전 본국으로 보낸 마지막 통신문

  • @user-yx1vy5ry6c
    @user-yx1vy5ry6c Před rokem +5

    항상 양질의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6군을 구하기 위한 폭풍작전이 사실은 6군을 미끼로 사용해서 소련군의 발목을 붙들기 위한 작전이였다는게 충격적이네요...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히틀러는 6군은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라! 이게 히틀러의 뜻입니다.
      같이 돌파하라 이런말도 안했어요.
      하지만 만슈타인은 모든 것을 예상했던 겁니다. 히틀러가 혹시 정신차릴 경우에 대비한 계획도 세워라! 이러고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그라드 앞까지 50킬로 남았는데 엄청난 소련군이 옆구리로 치고 들어오고 더 이상 진격은 어렵고 거기다가 제6군은 돌파는 커녕 걸어 나올 힘도 없다는 걸 알았던 겁니다.
      그런데 파울루스에게 그냥 앉아서 죽어라! 할 수도 없었기에 끝까지 희망고문을 하다가 그냥 후퇴해버린 것입니다.
      이미 출발할때부터 만슈타인이 예상했던 그대로 였습니다.

  • @honun12ify
    @honun12ify Před rokem +6

    히틀러가 눈앞의 코카서스 지대는 일단 포기하고 A집단군 병력 지휘권을 만슈타인한테 줬다면 로스토프를 거점삼아서 돈집단군+A집단군일부병력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망 돌파도 해볼만했을거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물론 6군 손실은 심했겠지만 30만명의 정예병력을 일부라도 구출하는게 장기적으로 봤을때는 큰도움이 되었겠지만요

  • @goldeneagle3218
    @goldeneagle3218 Před rokem +9

    만약 롬멜원수가 스탈린그라드의 6군을 지휘 했다면, 시작부터 참사를 피했을 겁니다. 오히려 적은 병력을 시가전에 투입 해서 역으로 소련군을 더 끌어 들였을 겁니다. 그리고 뒤 후방도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군에게만 맏기않고, 가마솥 전술을 사용 해서 주축군을 각각 감싸면서 후방에서 소련군 반격을 막았을 겁니다.

    • @tassader3317
      @tassader3317 Před rokem +4

      롬멜이었으면 히틀러 명령 무시하고 그냥 후퇴 했을듯

    • @goldeneagle3218
      @goldeneagle3218 Před rokem +4

      @@tassader3317 그랬을 겁니다. 스탈린에게 남은 30만을 재물로 갖다 바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 @tassader3317
      @tassader3317 Před rokem

      @@goldeneagle3218 그렇게 되면 전쟁은 1946년에 끝날수도 있겟내여 최악이라도

    • @tassader3317
      @tassader3317 Před rokem

      @@user-wm6iy9rz1g 그 스탈린 그라드 천왕성 작전에 묻혀서 그렇지 중부 집단군 에게도 소련군 이 공세 중이었어요 그냥 스탈린 그라드 구하러 가는게

  • @chulj2572
    @chulj2572 Před rokem +7

    베를린에서 지휘하는게 손자병법에 안맞는 행동이죠...파울루스가 멍청한 장군..애들 살리고 해임되면 되지..세상 멍청한 판단

  • @user-dj5bb9of5y
    @user-dj5bb9of5y Před rokem +10

    34만명이 ㄹㅇ 늬집 개이름인가 소련군한테는 적은 병력이엇지만 독일군한테는 저암담한 상황에있어서 무조껀 살려야하는 병력일텐데 만슈타인이 머리싸매면서 결국엔 어떻게 살리려고 햇으나 파울루스가 문제엿죠 사람은 살려고 하면 안움직이던 다리도 저절로 움직입니다 뒤에 소련 좇차오면 엉덩이에 불키고 뛰어올텐데 결국엔 사령관에 선택이 중요하겟군요 하나하나 소련군에 공세를 파악한 만슈타인 ㄹㅇ 명장이네요

  • @hwihwang
    @hwihwang Před rokem +6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1) 보크 원수가 남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면 어땠을까? 결코 A집단군과 B집단군을 나누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2) 라이헤나우 장군이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투입되었다면 어땠을까? 볼가강 후방의 소련군 보급선을 그대로 놔둔채 백만명이 갈려나가는 시가전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도시 점령보다는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후방의 예비부대에 대한 기습등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그나마 B집단군을 클라이스트가 이끌었다면 어땠을까? 성향상 시가전보다는 기갑부대의 집중적 운용과 기동전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4) 세바스트폴 점령 이후 만슈타인 원수를 레닌그라드로 보내지 않고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즉시 임명했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기습작전을 통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을 대규모로 포위 섬멸했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30만명이 섬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만슈타인 장군은 겨울폭풍 작전 이후 구출한 A집단군과 SS기갑사단을 동원하여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소련군 30만을 섬멸하였다.

  • @user-xv6zg4hd4h
    @user-xv6zg4hd4h Před rokem +3

    티거전차는 5분대기조 같이 운영 했죠 많은 전차를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 @chongso1765
    @chongso1765 Před rokem +5

    제 6군은 남부집단군을 위한 먹잇감이었다는 해석은 정확합니다.
    2차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묘사한 여러 서적에서도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일 6군이 일찍 항복하거나 포위망에서 빠져 나오려 전선을 축소 할 경우엔 남부집단군의 퇴로 또한 막히는 상황이었지요.
    스탈린그라드는 이미 점령 작전 한계시한을 넘겼고 소련군은 남부집단군 전체를 포위할 전력을 준비해 놓은 상태였기에 6군은 소련군 사냥군들을 불잡아 놓는 먹잇감의 역활밖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바바로사 작전은 모스크바 점령이 실패 했을때 그 한계가 다한 것이었으며 그때 독일군은 벨라루스 지역으로 까지 후퇴해 전선을 축소하고 소련과 협상에 들어가야 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그런 독일과 협상할 턱이 없었겠지요. 오스크바를 점령하지 못하면 독일은 패전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게 저의 결론입니다. 종심이 깊은 나라와는 절대 전면전을 하지말아야 합니다.

  • @asdfasdf6791
    @asdfasdf6791 Před rokem +5

    만물상자님!!! 구독자 1만명이 코앞이군요 !!! 곧 10만명에, 100만명까지. 새해에는 가능할것입니다!

  • @Ooooookokos
    @Ooooookokos Před 5 měsíci +4

    6군의 문제는 후방에서 보급장교나 해야 했을 파울루스같은 작자가 6군 사령관이 된것입니다. 만슈타인의 6군 구출작전시에 만슈타인의 요청대로 파울루수는 전력으로 탈출시도를 했었어야 했음. 그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다 아는 사실이었음. 결국 파울루스는 6군의 생존보다 자신과 독일에 남겨진 가족의 안위를 선택한거고 그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증거는 전후 그의 행적으로 밝혀지죠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4

    영상보면서, 동부전선의 전황을 마치 서양장기의 묘수풀이를 복기해 보고 머리속으로 여러기물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계산해 보아도 도저히 답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인 아군과 자기부대의 기물을
    살려서 뻬거나 값비싼 댓가로 희생을 피하기는 어려운 만슈타인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가니 정말 어떻게라도 할 수 있는것은 다해 보아서 라도 정말 도리가 없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군요. 소련군과는 달리 독일군 후방에 언제든 즉시 투입해야하는 구원투수 역활의 예비기물인 후방의 지원병력부대가 없었다는것은 냉철한 통찰과 계산 및 판단력이 뛰어난 메우 똑똑한 만슈타인의 냉정한 현실직시가 아니더라도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상황에 제17군 또는 A집단군이 궤멸될 수 도 있는
    더 나아가서 전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독일육군은
    붕괴될 메우심각한 상황으로 1942년과 43년은 동부전선에서 최악의 결정타가 나치독일이 조기에 2차 대전을 완패망할 수 있던 메우메우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전에 파울루스에 대하여, 제조명 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관련 영상에 달아둔 생각도 여기서 정리가 될 마지막 퍼즐 1조각을 찾은 느낌입니다.
    파울루스는 결코 우유부탄하기만해서 포위망에서 탈출안한 것이 아니고, 천둥작전으로 만슈타인의 구원부대와 연결가능한 탈출 거리가 무려50km
    단1회분의 연료로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수십대가 안되는 충분하지못한 수송수단과
    그것을 타고 이동할 전투장비와 전투병력이 탈출을 아예 할 수 없었던 메우 심각하게 여력이 없던 상황이었으니, 어쩌면, 그가 마지막으로 지휘하는 제6군단의 전 장병들이 만슈타인이 급히 편성한 허술한 만슈타인의 급히 편성된 부대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굳게믿고 의지라도 할 수 있게 헛된 유일한 1줄기 희망의 마지막 밧줄이라도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품을 수 있던
    작은 여지가 아니였을 합니다.

  • @grandmaster7146
    @grandmaster7146 Před rokem +5

    6군 탈출이 성공하려면 6군도 같이 치고나와야하는데 이미 방어할 힘도 없어서 공격자체가 무리임 애초에 파울루스가 바로 튀었어야 살아날수 있었죠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제6군만 볼 수 없고 남부 집단군 전체를 봐야합니다.
      독일 남부 집단군 전체가 가장 위험했던 시깁니다.
      2차 대전에서 추축국 중 이딸리아보다 가장 먼저 항복했을 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니까요.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7

    만약 저 때 모델이 6군 사령관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그 르제프 돌출부를 만들어 낸 인물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평가받는 그 모델 원수......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2

      @user-gm3zu6fh2r 그런데 제가 그런 예상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모델은 적어도 히틀러 앞에서 직언을 할 정도급의 깡이 있는 유일한 장군이라서
      그런 예상을 한 번 해 본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지옥 속에서 갈고 닦았다는 발터 모델의 직설 화법은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총통과의 설전에서도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한데,
      1942년 1월 20일,
      9군 사령관 취임 딱 5일째였던 모델은
      중부집단군의 증원 부대가
      총통이 주관하는 다른 작전에 예비대로 투입되어야 한다는
      중부집단군 참모장의 연락을 받자마자
      눈보라가 몰아치는 데도 조종사에게 명령, 러시아 하늘을 가로질러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 도착했고,
      갑자기 들이닥친 야전지휘관에게
      히틀러가 재차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모델은 총통을 모노클 너머로 차갑게 바라보며 질문했다고 합니다.
      "총통 각하, 9군 사령관이 누구입니까. 당신입니까, 저입니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에서 지도나 들여다보는 당신과 참모들보다는 전장에 있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통보하는
      일개 기갑대장의 발언에
      한참동안 할 말을 잃은 히틀러는
      결국
      "좋아 모델, 자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자네 목숨을 걸어야 할 걸."이라며
      모델의 지휘권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3일 전, 신임 9군 사령관 모델이 처음으로 늑대굴에 와서 보고를 올릴 때에도
      히틀러는 모델이 나간 후 루돌프 슈문트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자의 눈빛을 보았나? 나는 모델이 자신의 임무를 해 낼 거라 믿어. 하지만 그의 부하가 되고 싶진 않군."
      그리고
      폰 멜렌틴이 '험악한 언쟁'이라 정의한
      이 사건 다음 날인 1월 21일에
      모델은 예정대로 반격 작전을 개시하였고
      언쟁에서 승리의 대가로 받아낸
      증원 부대를 운용하여 소련군을 분쇄,
      그 공적을 인정받아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고 하는데
      그 어떤 장성도
      모델처럼 히틀러와 대놓고
      몇 번이나 언쟁을 벌여 총통의 고집을 꺾어 버린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예는
      일련의 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간
      1943년 가을,
      히틀러는 사령관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에 대해 불평했다고 합니다.
      "1941년에 보여줬던 투쟁 정신은 어디로 가버린 거요? 그렇게 용맹했던 사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렇게
      사령관들의 면전에서 장병들을 모욕하는
      히틀러를 향해
      단 한 명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1941년의 그 사내들이 전사했으니까요. 그들의 무덤은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히틀러의 분노를 직시하며,
      목숨을 걸고 싸운 부하들을 옹호하고 애도한 단 한 명의 사령관이 모델이었다고도 하니...
      그 파울루스와 비교해도 거의 하늘과 땅 차이급의 장군이자
      히틀러를 상대로 대놓고 언쟁을 벌여서
      히틀러의 고집을 꺾은 유일한 장군이 모델 윈수인 것을 보면......

    • @PurpleCat9794
      @PurpleCat9794 Před rokem +2

      맞아요. 모델이였다면, 일단은 포위를 안 당합니다. 왜나면, 전방을 정확하게 정찰하고, 이 사람은 plan B, plan C가 항상 준비되어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사람은 되도록이면 시가전도 피합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피해는 많고, 진전이 안보이니까요. Osprey의 commanders series 에 모델편이 나왔는데요. 미국 장교출신인 Robert Forczyk썼어요. 한국에도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있으면 꼭 권해드립니다. 전략적으로 모델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3

      @@PurpleCat9794 사실 발터 모델 원수는
      독일군이 선호하던 임무형 지휘체계 대신 명령형 지휘체계를 선호한 이질 분자였다고 합니다.
      부대를 세밀하게 통제하는 방어 전법을 추구하였고
      무선 감청과 정찰을 중시하여
      최대한의 정보 수집을 기반으로 작전을 수립, 승리를 거두었지만
      임무형 지휘체계에 익숙했던 참모들은
      자신들의 작전안에 일일이 간섭한다며 싫어했다고.....
      특히 모델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파상 공세로 인한 끔찍한 인명 피해를 직접 경험했었기에,
      휘하 장교가 제출한 전작서의 작전 과정에
      구체적인 전술 계획 없이 Wellenförmige Angriff(파상공세)로 대신하려 들면
      읽다 말고
      작성자 면상에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거 2차대전 당시
      서부전선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귄터 블루멘트리트 장군은
      모델은 부하들을 엄정하게 질책했던 것은
      그들이 멍청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뿐이며,
      참모장교 한 사람의 잘못은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참모장교들에게 유독 엄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고
      이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또한 “사단장과 군단장들은 모델을 정면으로 마주할 땐 그를 두려워했고 정확한 보고를 올리지 못하면 가차없이 질책을 받았지만, 이들은 모델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증언했다고.
      이렇듯 모델의 지휘 방식을 이해한 참모들과 부대 지휘관들,
      일선 장병들은 보고를 받을 때 전선에서의 고충뿐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나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전부 들어주는
      발터 모델을 무척이나 친근하게 여기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3

      @@PurpleCat9794 모델은 언제 어디서나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보고와 긍정적인 관점, 최소한 3개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도록 한다.
      그러면 내가 귀관들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도록 하지."를 강조하였는데
      이를 기반으로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해결책을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보고가 잘못되거나 머뭇거리거나 늦어지면
      폭언으로 점철된 호된 질책을 각오해야만 했다고.
      그 2차대전 최고의 전차 에이스 중 한 명인
      오토 카리우스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태어나서 그렇게 심하게 야단맞은 적이 없었으며 정신차려 보니 어느새 자신의 티거 소대는 나르바 강을 건너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눈썹을 꿈틀대던 모델이 직접 내린 명령만은 영원히 잊혀지지가 않는다고......
      대신 보고가 정확하고
      대답이 충실하면,
      혹한의 날씨에 대전차포병들이 자리를 이탈하여 대형 모닥불 앞에서 온기를 쬐고 있어도 관대하게 봐주었다고 합니다.
      빙긋 웃으며 "모닥불로 돌아가서 몸을 더 데우도록 하게."라고 말한 뒤
      재빨리 사라져 주는 '작은 키에 모노클을 착용한 장군'이 9군 사령관 모델임을 Bernhard Averback는 뒤늦게 깨달았는데
      어느새 모닥불 앞에 다시 모인 이탈자 동료들이 박수 갈채로 그를 맞이해 주었다고.....
      전사학자인 발터 괴를리츠는
      장병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장성은
      발터 모델이었으며
      당시 동부 전선에서 유행하던 말이 "모델이 있는 곳에선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다(Wo Model ist, geht's nicht schief).", "모델 한 사람의 가치는 수 개의 기갑사단에 버금간다."였다고
      나중에 연구 서적에 인용을 했다고.....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2

      @@user-wm6iy9rz1g그래도 모델이었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아군을 많이 철수시키면서
      동시에 소련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겁니다.
      후퇴불가만 외치는 히틀러를 공세적 후퇴라는 식으로 달래서 결국 르제프에서 완벽한 철수작전을 성공시킨 인물이니까 말입니다.
      스탈린그라드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고 말입니다.

  • @user-qv9vh8qs2i
    @user-qv9vh8qs2i Před rokem +4

    만슈타인 사령관의
    판단이 옳았던것
    같습니다
    소련군의 올가미처럼
    조여오는 거대한포위망을
    뚫고서 포위당한 독일제6군을
    구출한다는건
    도박이었군요
    결과적으로 클라이스트의
    A집단군을 보존하는게
    현명한 판단이었던것
    같습니다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만슈타인 시리즈와 만슈타인 번외편도 다뤘었습니다.
      어느 채널에서도 해보지 않은 컨텐츠였습니다. 그것을 모두 보시면 아시겠지만 만슈타인이 양심적이거나 인간적인 군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한가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만슈타인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도 앞날을 예상했고 그 예상은 다 맞았다라는 점이었습니다.
      만슈타인 번외편 4차하르코프 전투와 만슈타인의 눈물 (czcams.com/video/EwWYm4mdf-8/video.html)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3

    스딸린그라드 전투는 레드오케스트라 콜옵전작의 1,2,3편에서 소련군 전투임무의 주요 무대였고 콜옵듀티 특히 콜옵듀티2편에 스딸린 그라드에 포위되어 궁지에 몰린 독일6군의 보병사단 중 생존병력 9만여명의 일부가 역공을 가하는 장면이 나왔던 기억도 있내요.

  • @alexjoo7761
    @alexjoo7761 Před 11 měsíci +5

    엄밀히 말해.. 능력도 안되면서 카프카스 까지 진격한게 가장 큰 잘못이었고.. 이 A집단군 100만을 살리느냐 6군 30만을 살리느냐.. 의 선택의 기로에서 당연히 A집단군을 선택한거고.. 6군은 이들이 안전하게 철수하는데 있어 재물이 된거죠..

  • @user-fg7sn9ev6o
    @user-fg7sn9ev6o Před rokem +3

    최선 / 차선 / 차악 / 최악 !!!
    누구나 좋은 결과를 원하고 , 나쁜 결과를 피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 현실에서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말로 어렵고 슬프고 괴로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만슈타인의 선택은
    차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nano04386
    @nano04386 Před rokem +5

    만슈타인 원수님은 시가를 많이 태우셨는데 담배 피우시면서 쥬코프가 뭔 생각 하는지 계산 다함... 6군이 자기네 군마를 다 잡아먹었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도 아셨을 거고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3

      정확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결단력이 엄청 빠릅니다. 헤르만 호트에게 바로 철수 명령을 내리고 파울루스와 마지막 논의.

  • @user-uk7du8vu9p
    @user-uk7du8vu9p Před rokem +5

    만슈타인 원수는 정말 위대한 사령관이었습니다, 사실 전체 국면을 보았을 때 이미 히틀러 총통도 6군을 버리는 돌로 생각했을 것입니다만 , 정치적 군사적 계산으로는 구출하려는 시늉이라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그 역할을 가장 잘 해낼 군인이 만슈타인 원수였고...(다만 나중에 호트 장군이 말하기로는 스탈린그라드와 유전 둘다 처음에 조금만 서둘렀으면 둘다 점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만...)1942년 초에 승리를 낙관한 것은 히틀러만이 아니고 독일 참모단의 과대망상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독일군(더 나아가 추축군 전체가) 전황에서 우세했기 때문이고 특히 히틀러 총통은 마치 어린아이 처럼 신형전차 티거-1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정신력에 너무 큰 기대를 갖는...(구데리안장군은 총통을 독일판 사무라이로 생각할 정도...)/좋은 컨텐츠 감사드리고 주말 잘 보내십시요~♡

  • @kdh-lz4th
    @kdh-lz4th Před rokem +4

    항상 잘보고 잇습니다.
    최근들어 구독자 떡상중이시군요!

  • @cz1310
    @cz1310 Před rokem +7

    30만하고 150만하고 선택하라면 당연히 150만이죠.히틀러는 바보같이 다시 공격할때 교두보 필요하다고 일부 병력을 또 남기더군요.거참.군사적 재능이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4

      스탈린그라드 6군을 구하기 위해서는 A집단군까지 합쳐서 공격해야 간신히 구출할 수 있는데 그것은 못하게 하니 만슈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돈집단군하고 A집단군 그리고 6군하고 같이 망하거나 아니면 6군만 죽고 돈집단군과 A집단군은 살아나던가 둘 중 하나밖엔 없었습니다.
      만슈타인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 @tv-lz2vg
    @tv-lz2vg Před 8 měsíci +3

    독소전은 볼때마다 그숫자는 상상을 초월함.. 1개 군단이 아니라 1군이 전멸을 하다니..히틀러의 눈에는 장기판에 상이나 말 한개로 보였을듯..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8 měsíci +2

      1941년 8월~9월에 벌어졌던 키예프 전투.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무려 60만명 이상의 소련군 포로를 잡게 됩니다.
      이 기록은 인류역사상 단일 전투에서 가장 많은 포로 기록입니다.
      60만명이면 국군 전체 병력이 한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피해를 입고도 저항을 계속한 소련군이 오히려 미스터리일 정도입니다.
      구데리안 3부에서 이 상황을 자세히 다뤘습니다.

  • @user-yy2hk8nm8e
    @user-yy2hk8nm8e Před rokem +2

    A집단군은 간발의차이로 후퇴에 성공했는데
    그게 최선이라는걸 만슈타인이 간파하고 있었군요 조금만 늦었어도 A집단군도 위험해졌을텐데..

  • @user-jjy1015
    @user-jjy1015 Před rokem +5

    6:06이게 말이 된다고?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1

      말이 안돼죠. 그런데 실제 히틀러는 저런말을 했습니다.
      만슈타인은 A집단군을 빼서 자신의 지휘권에 넣어줘야 스탈린그라드를 구할 수 있다고 히틀러를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히총통은 A집단군이 코카서스 유전을 점령한 후 팔레스타인에서 롬멜과 만날거라는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쭉 설명하며 만슈타인의 청을 끝내 거절하고 맙니다.

    • @user-yy2hk8nm8e
      @user-yy2hk8nm8e Před rokem +1

      @@만물상자TV전쟁의신 ㅋㅋ 완전 망상 이었죠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청색작전보다도 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user-dj5bb9of5y
      @user-dj5bb9of5y Před rokem +1

      저때 아프리카는 이미 골로간 셈이고 곳있음 튀니지로 가는 상황인대 어떻게 코카서스를 먹고 점령한다는것인가 말도 안돼죠 당연히 이미 둘다 밀고들어가는것도 지친 상황이고 한시라도 후퇴만있을뿐 둘다 방어조차 할수없는 상황인대 이거 나폴레옹이와도 못합니다 ㄹㅇ 둘다 후퇴해야하는 상황인대 어떻게 연결을 망상 정도껏해야지

  • @sanha7007
    @sanha7007 Před rokem +4

    모스코바 유학생이 스탈린그라드란 도시를
    여행한것을보니 지금은 볼고그라드라고 이름도바뀌었고 뉴욕자유의 여신상보다더큰 동상과
    군사박물관에 북에서준 기념품도 전시되어있더군요!
    영상잘보았읍니다!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네. 지금은 스탈린그라드가 아닌 볼고그라드로 불립니다.
      이 도시를 욕심냈던 히틀러로 인해 34만명의 주축국 병사들이 포위되어 전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원래 히틀러의 계획은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지 스탈린그라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만 것입니다.

  • @lamoking647
    @lamoking647 Před rokem +4

    결국 모든 일은 히틀러가 거의 다 망친거네요
    A 집단군이 남쪽에서 소련군을 잡고 있었다면 6군에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만슈타인 입장에서 6군과 17군을 두고 양자일택을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니
      바쿠유전지대의 제17군도 전멸당할 위험한 상황이었고,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7개군의 발을 묶어두고있는 스딸린그라드시내에 갇힌 제6군이 아니였으면, 제17군 또한 탈출의 시간이 없었다고 봐야하며, 이는 곳 남부의 A집단군 전체의 붕괴를 의미하는대,
      이는 나치젱권독일의 2차 대전 조기패전과 직결되는 큰 문제였고, 이듬해 1943년은 나치정권독일의 존망이 달린 중대한 해였으니까요.

  • @PurpleCat9794
    @PurpleCat9794 Před rokem +3

    역시 만슈타인하고 스탈린그라드니까 많이 보시네요.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1

      감사합니다.
      스탈린그라드와 만슈타인 외에 다른 주제들도 무척 많습니다.

  • @TV-ph1tw
    @TV-ph1tw Před 5 měsíci +3

    독일 최고 전략가 이자 기동전의 대가 만슈타인 원수

  • @tassader3317
    @tassader3317 Před rokem +5

    06:00 그와중에 롬멜보고 팔레스타인 까지 오라 했던거네 2023년 으로 치면 김정은 이 북한군 보고 한미 연합 방어선 뜷고 일본 본토까지 상륙하라는 건가요?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1

      1942년 말 당시 실제 히틀러의 계획이 저랬습니다.
      롬멜이 이집트 카이로에 입성하고 동부전선에서 코카서스 유전을 차짛는데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독일아프리카군단과 코카서스로 내려간 독일군이 만날 수 있다는 히틀러의 과한 욕심이었습니다.

    • @tassader3317
      @tassader3317 Před rokem +2

      @@만물상자TV전쟁의신 차라리 북아프리카 병력을 동부에 투입해서 만슈타인 이나 돕지

    • @tassader3317
      @tassader3317 Před rokem +1

      @@user-wm6iy9rz1g 그 병력 이 유럽으로 철수 했으면 곧 있을 이탈리아,노르망디 상륙 작전 에서 연합군 들이 뜷기가 더 힘들었을듯

  • @user-jr7ey2qt7b
    @user-jr7ey2qt7b Před rokem +3

    재미있고 즐겁게 잘 보고있어요. 근데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중간중간에 배경으로 나오는 탱크가 나오는 게임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 ,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1

      07:10 제6기갑사단이 얼어붙은 강을 진격하는 장면 말씀하시는거 같네요. 나름 신경써서 고증에 맞게 올리는 것인데요.
      전차 위장도색, 그리고 주변 환경까지 정확히 고증한 것입니다. 게임명은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2 입니다.

    • @user-jr7ey2qt7b
      @user-jr7ey2qt7b Před rokem

      ​@@만물상자TV전쟁의신 정말 감사합니다 🙏

  • @jtk6911
    @jtk6911 Před rokem +3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 갇히게 된 것은 루마니아군 방어선이 손쉽게 무너진것이 결정적 요인

  • @wvwvwvwv0328
    @wvwvwvwv0328 Před rokem +3

    역사에 만약은 없다...이게 참 아쉽다

  • @choo3771
    @choo3771 Před 2 měsíci +3

    롬멜에 비해 한참떨어지는게 만슈타인이라고 봅니다 개개인의 전략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핵심참모로써 지도자가 국민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면 막도록 설득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롬멜처럼 암살이라도 시도했어야죠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2 měsíci +1

      롬멜의 고뇌가 느껴집니다.
      롬멜이 히틀러에게 회의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42년 10 말, 엘 알라메인 전투 직후였습니다.
      그리고 1944년 초 히틀러의 전쟁범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임무는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을 저지해야 하는 B집단군 사령관.
      그래서 롬멜은 갈등합니다만 그는 상륙을 막고
      연합군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연합군의 엄청난 전력을 눈으로 본 후
      롬멜은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깨닫고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기로 결정합니다.
      czcams.com/video/6rJi7M6HtJ0/video.html (롬멜은 히틀러를 정말 죽이려 했을까?)

  • @goldeneagle3218
    @goldeneagle3218 Před rokem +5

    만슈타인 원수의 책임은 없습니다. 구출 작전은 시작 부터 Mission Impossible 이였습니다. 만슈타인의 4기갑군이 구출 돌파를 했다고 해도 영하 40도 의 스탈린그라드에 갇힌 6군은 너무나도 지쳤습니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1

      그 부분은 저도 동감입니다.
      그 추운 겨울에 보급도 없는 그런 군이 후퇴를 한다는 것은 진짜 힘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만.
      사실 현대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철수작전으로 평가받는
      모델 원수의 들소 작전도
      후퇴를 미리 감안해서 몇 개월 동안 준비를 하고서야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모든상황이 최악의 조건이었으니 말이50km이지 쌩쌩 내달릴 수 있는
      고속도로 위에서 몇분이면 주파할 거리 50km가 아니며,
      험준하고 울퉁불퉁 구불구불한 길을 끝없이 펼처진 눈밭을 해치고
      나가야 하는 환경상 악조건에 하물며,
      총기수입용 윤활유까지 동계 장비에서 헐씬 잘 준비된 소련군에 비해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한체 간신히 살아남은 독일군은 모든 면에서 열악하였으니, 탈출에 겨우 성공하였다하여도 중간에 전투차량과 수송차량의 급유를 할 주유소 같은 급유 장소도 없고,도중 잘 준비된 적과 조우할 경우 갑작스러운 전투를 대비하여, 필요한 탄약 보급도 연료와 마찬가지로 1회분에 의료품이 부족해서 치료받지못한 부상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나마 온전하게 몸 성하게 살아 남은자들 마저 육체와 정신적으로 메우 지쳐 피로한 상태에서
      짙은 눈보라와 살을 애는듯한 영하40도의 엄동설한 눈밭을 해집고 나간다는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탈출 후 돈 집단군과 조우에 성공해도 부대병력대부분이 지쳐서 혹은 페스트 같은 질병이나 아사 또는 동사하여 죽었을 것으로 사료되어 전투가 아닌 비전투 병력 손실이 크게 발생하여, 독일 제6군은 부대자체가 궤멸이나 다름없을 만큼 수십 혹은 수백명의 극소수 인원만 남은체 전투력을 상실하고 만신창이가 되었을것
      고군분투와 악전고투 그것이 바로 스딸린그라드에 포위망에 갇혀버린 독일 제6군구의 상황이었습니다.,

    • @daewookkim4795
      @daewookkim4795 Před rokem +2

      @@pedrogim6952 딱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롬멜이나 모델처럼 튈 수 있을 때
      튀었어야지요.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daewookkim4795 스딸린 그라드 전투 수 개월전인 1942년 2월과 43년까지 치루워진 르제프 공방전에서 다가올 스딸린그라드 전투의 대실패를 히틀러가 좀더 빨리 깨닳았어아하는 교훈입니다.
      그나마 소련군의 증원 병력 축차 투입으로 방어전의 사자라는 별명을 가진 발터모델과 쿨루게가 지휘하는 독일 제9군이 성공리에 포위망을 탈 출 할 수 가있었습니다.
      실제로 르제프 전역을 살펴보면, 전선의 길이나 넓이만 한반도 땅 전체와 넓이와 맞먹는 광활한 지역이었고 이때부터 동부전선 전전선에서 독일군은 붕괴될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고 있었고, 조기 패전이라는 나치독일의 국가존망까지 걸린 문제내요.
      이미 겨우 돈 집단군과 합류해도 환경변수로 작용하는 악천후의 영하 40도의 융동설한 맹추위 속에 후퇴의 과정 중 길에서 부상병 대부분은 병세가 악화되어 죽거나 몸이 온전히 성한자들도 정신적으로 미쳐서 자살할 가능성도 있고, 후퇴 행군 중에 길 위에서 저 체온증으로 동사 하거나 굶어서 아사 하는 등 죽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속출하여, 독일 재6군은 부대 자체가 와해되어 버릴만큼 형편없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겁니다.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daewookkim4795 동부전선에서 독일육군이 보유한 수송장비의 대부분은 바퀴를 굴려야 하는 차량들이며, 바퀴 차량들 대부분 눈밭에 빠지면, 선두차량 단 1대만 이라도 눈밭에서 헛 바퀴질 하면, 눈속에 빠진 차량를 꺼내기위해 대열 전체가 멈춰서 그걸 또 사람이 밀거나 다른차량으로 끌어서 가야 하니 보급이 끊겨 식량을 먹지 못해 최소 몇일을 굶은상황에서 육채와 정신적으로 체력이 바닥난 사람들이 밀고 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그나마 한정된 보급용 연료를 전부 쓸 수 밖에 없을 만큼 극심한 연료 소모발생도 난제였을 겁니다. 특히 독일군의 기갑부대의 전차 궤도는 폯이 메우 좁아서 눈이 많이 쌓인 눈밭이나 얼음판에서 헛돌거나 미끄러짐이 발생하니 독일군 전차특유의 장점인 기동성에 제약이 생겨 어려움도 상당히 컸다고합니다. 물론 혹한기 전투를 치루며, 바퀴 대신 스키보드가 달린 프로펠러 설상전투장갑수송차나, 궤도 및 반궤도 차량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독일육군의 수송장비로는 동토의 땅 소련의 눈밭을 해치우며 나가기에는 메우 부적합하지 안았을까?하고 생각하게됩니다. 영하40도 이게 얼마나 추운건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너무 추워서 모든 항공기와 차량의 엔진도 올스톱, 엔진오일 및 냉각수 연료의 결빙과
      냉각계통파열. 권총 소총 가관총등 각종 포의 노릿쇠도 모두 얼어서 작동불가(예열사격이라는 말이 이래서 생긴 말 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금속으로된 각종장비나 총포신이 깨지는 일이 생김 정밀사격을 위한 광학조준장비역시 조준불가애 맨손으로 방아쇠나 금속을 만질 경우 피부가 달라붙어 살점이 떨어지는 부상을 입을 수 있음, 장병들이 멘눈으로 하얀 눈밭을 대낯에 오랫동안 바라볼 경우 설맹에 걸려 실명될 위험이 큼, 얼굴 및 손과 발등 멘살이 몇초만 옷 밖에 노출되어도 3도 동상에 걸림, 당시 독일육군 전부대의 전투화는 방한화가 아니몄으며, 전투화 밑창에는 하나같이 장교에서부터 말딴 이등병까지 모두가 쇠징이 밖힌 굽이었으니 발밑으로 올라오는 한기란 말할 것이 없을 것이며,
      동상이 걸리지 안는 것이 이상하게도 다행이다 시피한 소련을 준비없이 침공한 독일육군의 사정이었습니다. 동상에 걸리면 신체의 해당 부위의 피부가 검개 변해버린 바나나 껍대기 처럼 검게 변해 버리는대, 이것이 피부 또는 해당 신체부위가 조직이 괴사하는 현상이라고 하내요. 심해지면, 잘라낸다고합니다.
      장병들에게 식량으로 배급하는 소세지와 식빵은 딱딱하게 얼어버려, 그건 더 이상 소세지와 빵이 아니라 돌덩어리에 가까웠고, 그걸 먹기 위해서는 삽이나 전투용 손도끼로 쪼개서 장작불에 구워야 겨우 먹을 수 있었고 귀리죽으로 매끼를 때우니 혹독한 추위에 설사병까지 생겨 시들시들 죽어갔다는 사람들이 많음
      독일육군은 부대마다 병영에서 2시간에 한번식 화덕 불에 따뜻하게 대워진 벽돌이 장병들에게 지급되었고, 이걸 휴대용 난로로 사용할 겸 장병개인 총기의 노릿쇠의 윤활유가 얼지 안도록 따뜻하게 보호하는 역활을 하였다고하니 이런 상황을 보면 독일군은 어려운 너무나도 어려운 전쟁을 수행한 겁니다.
      훗날 발지전투의 서방 미영 연합군도 잠시 엄동설한의 추위를 맛보며,
      장병들 개개인의 총기가 얼어서 작동하지 못하면, 그 위 에다가 오줌을 싸다고 합니다만.
      후일의 발지전투를 치룬 서방 미영 연합군처럼 얼어있는 총기 위에 오줌을 싸는 것보단 훨씬 효율적인 방법이었을 겁니다. 혹한기 전투경험이 전혀 없던 미영 연합군이 세하얀 위장복을 입은 독일군에게 한방에 코피가 터진 것은 어찌보면, 연합군이 자기들의 전처를 그대로 밟을 수 도 있는 걸 잘 알았던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만4년간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얻어낸 결과로 한방의 강편치가 아니였나합니다.
      소련을 침공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겨울을 맞이한 독일육군 전투영상을 보면, 수송차량인 오펠블리츠 트럭바퀴에 스노우 체인을 감아주는 영상도 있더군요. 동부전선의 겨울 영상은 눈이많이내리는 와중에 진격에 장애가되니 야삽으로 차량의 바퀴가 눈속에 파뭍혀 나가지 못해 야삽으로 눈을 파내는 삽질까지 하는 장면이 흔하게 나와요. 삽질하면 군대시절 생각하실 분들 많을겁니다. 그런 삽질을 동부전선의 수많은 독일육군이 진격에 애를 먹으면서 눈보라와 싸우기 위해서 사용하내요.

  • @user-kz1sv1lv8e
    @user-kz1sv1lv8e Před 4 měsíci +3

    코카서스 들어간 남부 A 집단군을 위해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필수였을까요??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도시 이름값 때문에 집착했다는 사람들도 있고 독소전의 전황이 역전된 시기라 아쉽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4 měsíci

      스탈린그라드만 점령하던지
      아니면 코카서스 유전지대만 점령하던지 양자택일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둘 다 먹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이 컨텐츠를 보셨으면 아셨겠지만 만슈타인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예상하고
      겨울 폭풍작전 즉 독일 6군 구출 작전을 펼쳤습니다.
      만슈타인은 정말 영리한 인물이었지만 롬멜과 같은 우직함은 없었습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이 목표였기에 히틀러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틀러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독일군을 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주지하고 이 컨텐츠를 보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 @user-qc3wd1ks9t
      @user-qc3wd1ks9t Před 4 měsíci

      점이 아니라 면을 점령

  • @doogon-kim
    @doogon-kim Před rokem +3

    뛰어난 전술가들은 많은데 대전략가는몇없는군대 독일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좋은말씀 감사합니다.
      연합군에는 대 전략가가 있었죠. 심지어 그의 동상에는 The master of Strategy라고 새겨져 있을 정도입니다.
      바로 앨런 브룩입니다. 채널에서도 아주 자세히 다뤘습니다.
      혹시 안보셨다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czcams.com/video/djezQlsMRIg/video.html
      정말로 감탄하시게 될 것입니다. 연합군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 @user-il8xo4ss1o
    @user-il8xo4ss1o Před rokem +2

    영상잘보고잇습니다 궁금한게 잇는데 영상에 나오는 목소리 본인이신지..변조하신건지..남자다운목소리인지리 신기하네요ㅎㅎ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감사합니다. 모두 제 목소리입니다.
      기획, 녹음, 제작까지 전부 다 입니다.

  • @Someone111ify
    @Someone111ify Před rokem +3

    우크라이나로 가면 안된다는 글이 있는데. 모스크바를 코앞에 두고 갑자기 기갑전력이 우크라이나로 우회 한 것은 히틀러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전쟁 초기라고 하지만 당시 중부집단군은 여러 격전으로 소모가 엄청났고 전선도 3개의 집단군 중에서 가장 길어져서 보급 문제도 제일 심각했거든요. (참고로 독일의 보급체계는 당시 연합국에 비하면 존나 후진적.) 전격전의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부집단군은 충분한 재편이 필요했고 그 기간 동안에 일부 기갑전력만 키예프로 우회해서 러시아의 60만이 넘는 남서부전선군을 포로로 잡고 괴멸시키며 키예프를 점령하고 대승을 거둔 것. 그렇다고 해서 남부의 우크라이나가 전혀 쓸모 없는 땅도 아닌 것이 러시아의 대부분 공업지대와 자원 그리고 정예군이 그곳에 몰려있었고 그 60만이 넘는 남서부전선군이 붕괴함에 따라 후에 카프카스까지 남부집단군이 멈추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음.
    문제는 이게 이게 또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렇게 독일군이 너무 많이 진격 해버린 탓에 결국 또 보급 문제가 생기고 전선 관리가 힘들어져서 스탈린에서 포위당해서 6군이 전멸당하고 카프카스에서 철수해버리지만요

  • @user-tg2tn3ww3i
    @user-tg2tn3ww3i Před rokem +3

    포위망안에 34만이나 있었어요? 만쉬타인 회고록엔 23-24만명 정도로 나오던데...최대치가 26만정도로 봅니다. 사실 포위망에는 러시아군 포로도 많았고...루마니아 등
    동맹군 병력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 데...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독일 제 6군전체, 제 4기갑군 일부, 루마니아군까지 다 합친 숫자입니다.

    • @user-go3gq4kn3x
      @user-go3gq4kn3x Před rokem +3

      @@만물상자TV전쟁의신 전투가 끝난후 독일군 등 전사자가 14만4천. 포로 9만 천. 항공기 등으로 탈출 5만명임을 고려하고 루마니아 병력까지
      더하면ᆢ34만이란 숫자가 나올 수도 있겠군요

  • @user-dt7zq9ix6e
    @user-dt7zq9ix6e Před rokem +2

    이병력 빨리 빼서 베를린 방어에 투입 했다면 최소 허무하게 지지는 않았을듯

  • @user-ec8lp9vl5x
    @user-ec8lp9vl5x Před rokem +2

    25만(독일군) 소련군(30만) ㅇ격돌,,,전쟁통계는 거의전부 엉터리 더라,,,,

  • @sumanyang7913
    @sumanyang7913 Před rokem +4

    애초에 히틀러가 바보였죠.

  • @jaehokang1891
    @jaehokang1891 Před rokem +4

    장군들의 작전을 이해 못 하는 육군 상병 히상병 -어느 유투버-

  • @jtk6911
    @jtk6911 Před 11 měsíci +2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이 패한 것은 루마니아군 방어선이 너무 쉽게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원인

  • @VitorJKhan
    @VitorJKhan Před rokem +5

    20세기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와
    80년 후 21세기 우크라이나의 바흐무트는 데자뷰.
    늘 승리는 러시아.
    바흐므트후에 하리키우는 곧 고립되죠.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하르코프가 하르키우를 가르키는 지명입니다. 대규모 전투를 3차 까지 치뤄낸 독소전쟁 격전지

    • @pedrogim6952
      @pedrogim6952 Před rokem

      현재 우크라이나 전역의 모든 지명들이 전부 모두 2차 대전 동부전선의 격전장입니다.

    • @hwihwang
      @hwihwang Před rokem

      솔리다르가 넘어가면 바흐무트도 곧 끝이다. 레오파트 전차 20대로 뭘 할 수 있겠는가? 나토 지상군과 공군이 투입되지 않으면 러시아를 무너뜨리기란 불가능이다. 장기전에서 로스케를 굴복시킨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게 자급자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jsimons4103
      @jsimons4103 Před rokem +1

      @테스트 ㅋㅋㅋ 어디 딴 나라에 살고 있나? 아니지 화성인인 모양이네. 어제 솔레다르 함락 뉴스는 가짜뉴스인가 보네.. 여기 독자들은 수준 좀 있던데 웬 ㅁㅊ이가 떠들고 있나? 반도체? ㅍㅎㅎㅎ 지난주 미사일 수백발 쏜것들이 모두 작년 10월 생산분이다! 뭐 ㄱㅅ리 ㅁㅁ멍

    • @jsimons4103
      @jsimons4103 Před rokem +1

      @테스트 ㅋㅋㅋ 그러니 너가 좀비 얼가니라는거다 서방의 가짜뉴스나 들여다보고 앉았으니 세상물정 ㅈ도 아무것도 모르는거지 ㅋㅋ 솔리다르는 바흐무트 북쪽 인근도시로 철도역과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요충지다. 너 지도볼줄 모르지.. 에구구 우쭈쭈야 지도라는건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거란다 ㅋㅋㅋ

  • @soan-gx6pf
    @soan-gx6pf Před rokem +1

    6군단과 ss6기갑군단 둘다 전멸했네요 ㅎㅎ

  • @user-de1sg1vt5x
    @user-de1sg1vt5x Před rokem +2

    하이라이트 브금좀 알수있을까요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1

      theory of relativity인 것 같습니다.

    • @user-de1sg1vt5x
      @user-de1sg1vt5x Před rokem +1

      @@만물상자TV전쟁의신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신지요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네 감사합니다. 주말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 컨텐츠는 얼굴 나와서 말로 때우는 다른 컨텐츠에 비해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 자료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구독자 여러분의 성원이 더욱 필요합니다.

  • @user-tl8uh2bg2j
    @user-tl8uh2bg2j Před 10 měsíci +1

    괴링: 흐뭇

  • @user-yg1zy9lw6l
    @user-yg1zy9lw6l Před rokem +2

    형님 미국 배트남 전쟁도 가능한가요???

  • @user-fk6kz6ok7u
    @user-fk6kz6ok7u Před rokem +6

    만슈타인의 쇼라는 의견 동의가 안됩니다 파울로스의 6군은 어차피 죽을 것 만슈타인에게 갔어야했습니다 항복후 포로가 되어 대부분 죽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파울로스가 죽기살기로 만슈타인에게 갔다면 훨씬 많은 병사를 살렸을거라 생각합니다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4

      이 컨텐츠를 끝까지 다 보셨는데도 이해가 안되셨는지?
      만슈타인은 굉장히 명석한 인물입니다. 사료를 캐고 캐다보면 더욱 그것을 알게 됩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가 독일 6군을 구하는 것도 더 밑에 있는 A집단군을 구하는 것도 못하게 할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핵심 키는 그것입니다. 만슈타인은 모든 것을 예상했습니다.
      쉽게 말해 못된 꼰대 상사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하는 척을 했다는 것을 쇼라고 표현한 것이라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 @user-dx7cv6bc2l
      @user-dx7cv6bc2l Před 6 měsíci +2

      이분이 말하는건 어차피 다 죽을거 하극상 각오하고 파울루스가 결단을 내렸어야 한다는거 같은데요..?

  • @younghwangbo6198
    @younghwangbo6198 Před rokem +3

    결국 포위돤 30만 중 99%는 사망

  • @user-nv4wu7hc3f
    @user-nv4wu7hc3f Před rokem +3

    Another enemy Russia winter

  • @user-ec8lp9vl5x
    @user-ec8lp9vl5x Před rokem +2

    독일군 제6군25만 소련군61,62군 30 만,,,전쟁사의통계는 거의전부 엉터리,,

  • @user-tg2tn3ww3i
    @user-tg2tn3ww3i Před 2 měsíci +1

    만슈타인의 책임? 물론 큽니다. 히틀러의 명령에 순응...6군 정예병력 20만명을 잃어버렸고...이 손실은 "그가 이룬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성과"를 훨 넘는 것이었죠.

  • @markpark6450
    @markpark6450 Před rokem +2

    만슈타인 책임 어그로 끄네 ㅎ

    • @만물상자TV전쟁의신
      @만물상자TV전쟁의신  Před rokem +2

      이 컨텐츠는 어떤 채널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사실을 매우 이해하기 쉽고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만슈타인이 대단했던 점은 닥치기 전에 상황을 예상한다는 점이었고 대부분 그 예상은 정확했습니다.
      만슈타인이 A집단군을 자신에게 줘야만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제6군을 구할 수 있다고 히틀러에게 강하게 주장했지만 거절당하자
      결국은 6군을 버리고 다른 부대를 살리는 거 외엔 도저히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 @user-qc3wd1ks9t
    @user-qc3wd1ks9t Před 4 měsíci

    없음

  • @freakshow9612
    @freakshow9612 Před rokem +4

    파울루스가 겁쟁이인것도 한몫했음

  • @kingmaker0101
    @kingmaker0101 Před 5 měsíci +4

    누가봐도 포위 섬멸 직전인데 사수 하라고 한 미친놈 책임이죠....공수로 전쟁 물자를 공급 할 수 있다는 말도 안되는 개소리까지 믿고....파괴되서 박살나는 전차 중포도 공수 한다는 건가...